6일부터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창작소 공간과 박문수 연출의 깊은 시선
구원과 파멸, 그 경계에 선 인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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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 밤'은 무대 위에 구체적인 시공간을 설정하기보다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조건 아래 놓인 인간의 감정과 딜레마에 집중한다. 주인공 이다, 아니타, 도준, 코라 등 네 인물은 각자 구원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여정은 끝없이 반복되는 모순과 갈등의 구조 안에 갇혀 있다. 전선(戰線)이 아니라 감정의 전선이 이들의 삶을 가르고, 그것은 곧 우리 모두가 마주하는 일상의 균열로 확장된다.
박문수 연출은 이번 무대를 통해 인간이 가진 선과 악, 구원과 폭력의 모호한 경계에 집중한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인물들, 사랑과 증오가 한 몸 안에서 뒤섞이는 상황은 관객에게 명확한 결론 대신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그는 연출의도에서 "포식과 구원의 순환, 가해자와 피해자의 혼란"을 언급하며, 이 연극이 단지 역사적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동시대의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임을 분명히 한다.
무대 위의 표현 또한 그러한 연출 방향성을 따라간다. 무대디자인을 맡은 김한신은 인물 간의 거리와 단절을 공간적으로 형상화하며, 박혜림의 조명은 '은의 밤'이라는 제목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빛의 감정을 구현한다. 음악감독 한수진은 장면 전환마다 정서적 맥락을 강화하고, 움직임 디자이너 이재윤은 내면의 긴장과 억압을 신체로 치환한다. 이처럼 시각과 청각, 신체 표현이 종합적으로 작동하면서, '은의 밤'은 단순한 전쟁극이 아닌 심리극으로서의 면모를 뚜렷이 드러낸다.
작품의 메시지는 기획의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은의 밤'은 전쟁을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불안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은 지금 여기, 우리 사회와 개인 안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구조적 폭력이며, 감정의 전염이다. 은이라는 금속이 가진 이중성-눈부신 반짝임과 동시에 차가운 살기-은 극 중 인물들의 감정 구조를 상징하며, 인간이 믿는 신념이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공연은 공연창작소 공간과 '홧김에 박문수 프로젝트'의 협업으로, 긴 호흡의 창작 과정과 실험적 접근을 거쳐 완성되었다. 제작진은 "예술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며, 제한된 무대 공간 안에서 정교하고 의미 있는 창작을 완성하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홧김에 시작되었지만, 사소하지 않은 충동'이라는 프로젝트의 정체성은 이번 작품에서도 뜨거운 에너지로 이어진다.
출연진 또한 강력하다. 김신실(이다), 장영주(아니타), 양동탁(도준), 임정은(코라) 등 주역 배우들은 각자의 인물에 깊이 몰입해 인간 존재의 불안과 저항을 밀도 있게 표현한다. 장필상, 강혜린, 김승찬, 민경록을 비롯한 조연과 앙상블 배우들까지 모두 서사의 복합성과 감정의 진폭을 충실히 뒷받침한다.
전쟁은 끝났는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가. '은의 밤'은 이러한 질문을 우리 곁에 들이밀며, 극장이 아닌 삶의 공간에서 되새겨야 할 감정과 선택을 환기시킨다.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의 어둠 속, 관객은 눈부신 은빛 속에 감춰진 차가운 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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