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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5. 26. 08:18

연극 '오랜 소년'
혼수상태로 멈춘 청춘, 유쾌한 농담과 뭉근한 진심으로 다시 걷는 성장의 길
22년을 건너 돌아온 한 소년,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묻는 삶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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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중앙, 세상과 단절된 채 멈춰 선 한 인물. '한석봉'의 22년은 그렇게 정지된 시간 속에서 쌓여 있었다. / 사진 무죽 페스티벌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고들 하지만, 그 흐름의 방식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연극 '오랜 소년'(작·연출 변영후)은 그 다층적인 시간의 흐름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이며, 과거에 머문 한 남자의 현재를 통해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시간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대는 혼수상태로 22년을 보내고, 41세의 육체로 눈을 뜬 '한석봉'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다 갑작스레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어느 날 기적처럼 깨어난다. 그러나 그의 기적은 결코 영화나 뉴스 속에서 반복되던 '희망의 서사'처럼만 작동하지 않는다. 연극은 석봉이 깨어난 이후의 삶, 달라진 세상과 어긋나는 자기 자신과의 마주침에 집중하며, 이 기적이 오히려 낯선 현실로 밀어넣는 시작점이 되었음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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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의 언어와 감정의 몸짓 사이, 무대 위에 펼쳐진 현실과 상상의 경계. / 사진 무죽 페스티벌
극 초반, 석봉은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멈춰 있었던 학업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에게 문제는 단지 공부의 공백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근본적인 정체성의 혼란이다. 이 막막함을 견디는 그의 곁에는 19세의 소녀 '이화'가 있다. 이화는 단지 학원 친구가 아니라, 석봉의 갇힌 시간을 열어젖히는 중요한 동반자다. "너의 어제가 다른 사람들에겐 22년 전 일이야"라는 이화의 대사는, 석봉이 세상과 관계 맺기 위해 건너야 할 시간의 간극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함께 담배를 피고, 옥상에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고, 무심한 말장난을 주고받는다. 마치 서로가 '동년배'라도 된 양. 그러나 이 모순된 우정은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시간의 상대성을 가장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어디선가 한 번쯤 놓친 시간을 살아간다. 석봉의 어머니는 신앙으로 버텼고, 주치의였던 의사는 자신의 전 인생을 석봉 치료에 쏟아부었다. 유하나는 이미 자녀를 둔 어머니가 되어 있고, 과거의 친구 김오일은 동네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모두 석봉을 기다렸지만, 그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시간이 아니라 기억과 관계, 책임과 애정의 지속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랜 소년'이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관계와 시간의 감각을 결코 무겁고 진지하게만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연극은 의도적으로 유머를 섞고,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며, 장면 곳곳에 과장된 설정을 삽입한다. 특히 석봉이 기적적으로 깨어나 방송 인터뷰를 받는 장면, 햄버거 광고 패러디 장면, 김오일과의 '22년 전 농구 시합 이어하기'는 희화화된 리얼리티를 통해 '기억의 왜곡'과 '시간의 우스꽝스러움'을 풍자한다. 그러나 그 우스꽝스러움은 결코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그 장면들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인생의 우연과 씁쓸한 농담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감정선은 유하나와의 재회다. 석봉에게 유하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설렘이자, 멈춰버린 감정의 '기점'이었다. 그러나 유하나는 이미 과거를 지나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제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았으면 좋겠어." 이 장면은 석봉에게 현실을 각인시키는 동시에, 관객에게도 무언가를 놓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조용히 전한다. 감정은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관계는 시간과 함께 변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따뜻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그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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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마주 선 인물들. 이들의 시선과 감정이 엇갈리는 순간. / 사진 무죽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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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턱, 두 사람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하루에 적응 중이다. / 사진 무죽 페스티벌
그리고 이화. 이화는 이 연극의 또 다른 중심이다. 석봉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경험을 쌓고,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시킨다. 『오랜 소년』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이 다시 연극의 제목으로 돌아오는 이 구조는, 이야기 안의 이야기라는 메타픽션적 장치를 통해 성장의 윤회를 은유한다. 이화는 끝내 군 입대를 택하고, 석봉은 뒤늦게 글쓰기를 시작한다. 그들이 각자의 좌표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통해, 연극은 성장이라는 것이 단지 나이에 따라 자동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경험, 실천,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비로소 다듬어지는 감정의 층위들—그것이 '어른이 되는 법'이다.

무대 구성 역시 인상 깊다. 치킨집, 옥상, 검정고시 학원, 카페 몽상, 건설 현장, 무인도, 산 정상 등 다양한 공간이 배우들의 최소한의 움직임과 도구 활용만으로 전환된다. 장면의 다채로움은 마치 한 편의 로드무비처럼 전개되지만, 정작 이 여정은 인물들의 내면을 향해 깊숙이 파고드는 여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관객이 '기다림'이라는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사랑을, 우정을, 꿈을 기다리는 사람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어떤 이의 '성장'을 묵묵히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석봉이 마지막에 햄버거를 사들고 가는 모습은,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겠다는 작은 선언처럼 다가온다.

'오랜 소년'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아 포기했던 무언가, 너무 아파서 꺼내지 못했던 감정, 너무 오래되어 희미해진 관계들. 그 모든 것들 속에서 '나는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꺼내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연극은 단지 한 인물의 회복담이 아니라, 시간과 관계, 성장과 기다림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열아홉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두려운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고, 기다릴 것도 많다. 그래도, 나는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 여전히 그 '오랜 소년'인 채로.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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