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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환 크레페 펀드 대표이사 |
"우리 회사 임직원은 나를 포함해 모두 인공지능을 능숙히 다루고 있다. 따라서 별도의 AI 전환 전략은 필요 없다." 만약 당신이 그리 생각하고 있다면, 잠시 멈추고 거울을 한 번 들여다보길 권한다. 이번 칼럼의 주인공은 당신이다.
어느 마을에 솜씨 좋은 구두장이가 있다. 그의 가게는 화려하고 고객이 줄을 서며 수입은 넘쳐난다. 어느 날 마을 변두리에 경쟁자가 하나 생긴다. 가죽은 거칠고 바느질은 서툰, 어딘가 모자란 구두를 만드는 가게다. 호기심에 들렀던 손님 한둘이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간다. 솜씨 좋은 장인은 그 소식을 듣고 코웃음을 친다. "어설픈 구두에 누가 돈을 쓰겠나. 우리는 우리 일이나 잘하면 된다."
처음에는 그의 말이 옳다. 그러나 변두리 가게의 구두는 조금씩 좋아진다. 처음엔 가격이 싸다는 점이 매력이었지만, 어느 순간 품질이 '쓸 만한' 수준에 이르고, 마침내 '꽤 좋은' 수준이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장인의 가게는 텅 비어 있다. 대부분의 고객이 "어설픈 구두"를 선택한 것이다.
◇ 30년 전, 어느 경영학자의 보고서
이것은 비유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버드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는 1995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논문과 1997년 책 "혁신가의 딜레마"에서, 이 우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무너진 거인들은 무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경영했기 때문에 무너졌다.
그가 명명한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은 늘 시장 변두리에 어설픈 모습으로 등장한다. 잘 나가는 기업의 눈에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 그러나 이 어설픈 새 기술이 조용히 진화하다 어느 순간 '충분히 좋아지면' 시장을 통째로 뒤집는다. 경영인이 변화를 못 본 게 아니다. 기존 고객과 이익을 지키는 합리적인 판단을 했고 당연히 외면했을 뿐이다.
◇ 회의실의 5천만 달러, 캐비닛 속의 토스터
2000년 9월의 댈러스, 블록버스터 본사 회의실을 상상해 보자. 무명의 작은 스타트업 넷플릭스의 두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와 마크 랜돌프가 블록버스터 CEO 앞에 앉아 제안한다. "우리 회사를 5천만 달러에 사 주시면, 우리가 블록버스터의 온라인 사업부를 맡겠습니다." 회의실에 짧은 정적이 흐른 뒤, 블록버스터 임원들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우편으로 영화를 빌려주고 있는 이 작은 회사가, 9,000개 매장과 연체료 수입만으로도 8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자신들에게 5,000만 달러를 달라고 제한한다고? 그 제안은 정중히 거절된다. 정확히 10년 뒤, 넷플릭스의 기업가치는 130억 달러를 넘어서고 블록버스터는 파산을 신청하고 만다.
장면을 25년 앞으로 되돌려 보자. 1975년 12월, 뉴욕 로체스터의 코닥 연구소. 24살의 신입 엔지니어 스티븐 새슨이 토스터 크기의 상자를 들고 임원실로 들어선다. 흑백 사진 한 장을 찍는 데 23초가 걸리는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다. 시연을 마친 새슨에게 한 임원이 묻는다. "그런데 이게 우리 필름 사업에 무슨 도움이 되는 건가?" 새슨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의 발명품은 그날 캐비닛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37년이 지난 2012년 디지털카메라가 세상을 뒤집을 때 코닥은 파산한다. 자신이 발명한 기술이 자신을 죽인 것이다.
◇ 잘 나갈수록 함정은 더 깊어진다
크리스텐슨의 가장 아픈 통찰은, 잘나가는 기업일수록 함정이 더 깊다는 점이다. 1등 기업 안에서 새 사업안을 들고 가는 직원은 매번 같은 질문에 부딪힌다. "그 작은 시장에 우리가 왜?" "본업의 1%도 안 되잖아." 이성적인 임원의 합리적인 판단이 새 기술의 싹을 매번 잘라낸다.
그래서 크리스텐슨은 한 가지 처방을 내놓았다. 본체에서 떼어낸 작고 독립적인 부대(autonomous unit)를 별도로 세우라는 것이다. 그래야 본업의 중력에서 벗어난 새 기술이 자란다.
◇ 다시, 거울 앞에서
지금까지 필자가 그려온 AI 커머스, B2A, 에이전트 마케팅의 세계는 와해성 혁신의 모든 특징을 갖추고 있다. 아직 어설프고, 변두리에 있으며, 잘나가는 기업의 임원의 눈에는 신경 쓸 만한 기술과 제품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75년 코닥의 토스터처럼 말이다.
이쯤에서 글 첫머리의 거울로 돌아가 보자. 임직원이 챗GPT를 능숙히 다루고 있으니 AI 전환은 별도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판단은, 새슨의 시연을 보고 "그런데 이게 우리 필름 사업에 무슨 도움이 되지?"라고 물은 코닥 임원의 질문과 정확히 같은 위치에 있다.
챗봇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토스터를 한 번 시연해 본 일일 뿐, 본업의 의사결정 방식과 영업 조직의 구조, 고객 데이터의 흐름을 처음부터 다시 짜는 작업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차이를 혼동하는 순간,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일을 잘하는 그 경영인이 자기 손으로 캐비닛을 열어 자기 회사의 미래를 집어넣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번 와해는 속도가 다르다. 파산까지 코닥은 37년이 걸렸다. 블록버스터는 10년이 걸렸다. 에이전트의 시대에 그 유예기간이 3년이 넘지 않을지 모른다. 솜씨 좋은 잘나가는 장인이 먼저 망하는 것이 와해성 혁신의 비정한 법칙이다.
/이영환 크레페 펀드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