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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노마드’, 초원과 오아시스에서 만난 실크로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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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2. 01. 08:30

카라반과 유목이 남긴 이동의 문화유산
동서 문명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다음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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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의 이동식 천막집 유르트를 구현한 전시 공간. / 사진 ACC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새로운 길의 지도를 펼친다. 지난 25일 아시아문화박물관 중앙아시아실에서 개막한 상설전시 '길 위의 노마드: 중앙아시아 이동과 교류의 유산'은 실크로드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자리다. 지난해 해상 실크로드를 조명한 '몬순으로 열린 세계'에 이어, 이번에는 초원과 사막을 건너온 육로의 길을 따라 동서 문명의 연결을 차분하게 되짚는다. 이번 전시는 2027년 11월 24일까지 이어지며 아시아문화박물관 중앙아시아실에서 상설로 관람할 수 있다.

실크로드는 종종 하나의 선으로 기억된다. 어느 한 길을 따라 비단이 서쪽으로, 유리공예품이 동쪽으로 흘러간 이야기.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 단순한 이미지에 질문을 던진다. 길은 언제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 발걸음이 모이고, 주고받는 물건과 생각이 공간을 연결하면서 비로소 길이 생겨났다. 상인과 순례자, 장인과 학자, 유목민과 가축까지.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사막을 누볐던 모든 존재가 만든 선들이 포개지며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전시는 바로 그 길 위에 선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첫 번째 노마드는 카라반을 구성한 이동 상인이다. 말과 낙타에 상품을 싣고 낮과 밤을 가로질렀던 사람들. 그들이 오가던 길 위에는 웃음과 다툼, 생존과 도전이 함께 있었다. 목표를 향해 이동하는 그들의 어깨 위에는 물건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이야기들이 얹혀 있었다. 전시는 이들의 흔적을 물결처럼 연결해 보여준다. 대상 무역의 원동력은 단순한 필요나 이익이 아니라,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끊임없는 교류의 의지였음을 관찰하게 한다.

다른 한 축은 자연을 벗 삼아 살아온 초원의 유목민이다. 그들은 도시의 돌벽이나 문명이 만든 확실한 좌표 없이, 별과 바람을 길잡이 삼았다. 이동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고, 공동체 모두가 자연의 호흡 속에서 흔적을 최소화하며 삶을 유지했다. 양은 옷과 천막을 만드는 양털을 주었고, 젖은 치즈와 발효유가 되어 식탁을 채웠다. 말은 이동과 사냥, 신앙까지 함께한 삶의 중심이었다. 유르트라는 천막집 역시 찢어지지 않는 결속의 상징이었다. 이동하는 방식 그대로 공간을 접고 펼치며 살아온 유목민의 지혜는 지금도 초원 곳곳에 남아 있다.

이 두 노마드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하나의 길 위에서 교차했다. 전시는 이들의 만남과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산을 공개한다.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오아시스 도시를 오가며 거래되었던 도자기와 금속공예품, 짙은 색채의 세밀화와 직물, 길 위에서 만들어진 먹거리와 의복, 목가구와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교역의 흐름이 만들어낸 물질문화는 오늘의 관람객에게 그 움직임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단순히 아름다운 공예품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시간과 기술, 종교와 감정이 함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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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전통 카펫의 문양과 짜임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 구성. / 사진 ACC
전시는 크게 세 갈래의 길을 따라 구성된다.

'카라반의 숨결이 쉬어간 자리', 먼저 관람객을 맞는 것은 카라반사라이, 즉 대상 무역을 이끈 이동 상인들의 쉼터다. 먼 여정에서 돌아온 낙타가 목을 숙여 물을 마시고, 상인들은 서로의 언어로 무사 안부를 나누며 숨을 돌렸다. 그들은 이곳에서 정보를 교환했고, 다음 목적지를 향한 길을 물으며 새로운 동행을 찾았다. 하루도 머무르지 않을 것 같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문화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머무름과 이동이 교차한 자리에서 실크로드의 다음 장이 쓰였다.

'교역이 꽃피는 곳, 바자르', 도시에 도착하면 시장의 소리와 냄새가 관람객을 감싼다. 바자르는 단순한 물건의 교환을 넘어서, 사상이 퍼지고 기술이 번지는 길목이었다. 과일을 파는 청년의 손끝에서 낯선 손님과의 대화가 이어지고, 향신료 냄새에 이끌린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잊은 채 그 공간을 거닐었다. 도자기 장인은 새 무늬를 익히고, 장인의 옆에서는 악기 제작자가 음계를 맞춘다. 서로를 통해 세계는 넓어졌다. 그러한 만남이 반복되며 실크로드는 더욱 다층적인 문화지도에 가까워졌다.

'초원, 자연과 조율하는 삶', 길의 끝, 혹은 또 다른 시작점은 언제나 초원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 바람이 지나가고, 유목민들의 유르트가 계절마다 이동하듯 삶도 끊임없이 변화했다. 말과 함께한 그들의 이동은 종교와 예술에도 흔적을 남겼다. 마구와 말갖춤을 장식한 문양 속에, 생존만을 위한 도구가 아닌 미적 감각과 세계관이 스며 있다. 유목민의 지혜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이 전시가 초원에서의 시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동과 정주를 나누는 이분법을 넘어 서로가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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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문화박물관 상설전시 '길 위의 노마드'의 1부 '카라반의 숨결이 쉬어간 자리' 공간. / 사진 A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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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전통 자수 직물 수자니. 초원과 오아시스 도시의 무늬와 색을 담아 교역으로 이어진 생활문화를 보여준다. / 사진 A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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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면 영상 공간에서 펼쳐지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음악과 연주. / 사진 ACC
이번 전시는 아시아문화박물관이 수년에 걸쳐 쌓아온 조사와 수집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선보인다. 카펫과 직물, 악기, 목공예품, 도자기, 유목민의 생활 도구를 비롯해, 현지에서 직접 기록한 영상 아카이브까지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또한 몽골국 문화부와 국립문화유산센터, 우즈베키스탄 문화부와 사마르칸트시, 주한우즈베키스탄대사관, 키르기즈공화국 문화부와 주한키르기즈공화국대사관,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 문화부와 주한투르크메니스탄대사관 등 다양한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기증과 구입, 콘텐츠 제작이 이뤄졌다는 점에서도 전시의 가치가 크다.

김상욱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당장은 '길 위의 노마드'가 중앙아시아의 예술과 생활문화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이동과 교류가 만들어낸 실크로드의 유산을 오늘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ACC는 앞으로도 상설전시를 통해 아시아 각 지역의 문화다양성과 공존의 지혜를 꾸준히 소개하겠다고 전했다.

실크로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누군가의 떠남은 또 다른 이의 만남이 되고, 그 만남이 다시 새로운 길을 만든다. 우리가 걷는 도시의 길에도 오래전 누군가가 남긴 방향이 스며 있다.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관객의 발걸음 또한 그 여정 속에 놓인다. '길 위의 노마드'는 과거 위에 오늘을 겹치며, 다음으로 이어질 길을 상상하게 한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실크로드는 지금도 누군가의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고, 그 발자국은 다음을 향해 조용히 움직인다. 이번 전시는 그 길 위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였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묻게 한다. 발걸음 하나가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며, 또 다른 길을 잇는 시작이 됨을 일깨운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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