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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선 지난 12일 '필리핀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는 필리핀 국립대학교(UP)에서 3000 명이 넘는 학생과 교수들이 강의실을 박차고 나와 "부패한 정부를 규탄한다"며 동맹휴업 시위를 벌였다.
정치학과 3학년인 마리셀 칸델라(22)는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엄청난 돈다발이 홍수 피해를 막는 데 쓰여야 할 우리의 세금이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며 "소수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도둑맞았는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학생들의 분노는 비리가 태풍 피해라는 현실과 맞물리면서 더욱 커지고 있다. 바탄 주립대학교에 다니는 존 마이클 파스쿠빌로(21)는 "최근 태풍으로 고향이 물에 잠기는 것을 보며 우리가 정부의 탐욕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에 무관심하던 친구들조차 이번 홍수 비리에는 분노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번 시위의 도화선이 된 것은 최근 필리핀 의회 청문회에서 나온 충격적인 폭로였다. 건설회사 관계자들은 마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 등 하원의원 최소 17명에게 뇌물을 줬다고 진술했고, 공공사업도로부 출신의 전직 엔지니어도 15개 건설사가 담합해 1000억 페소(약 2조 4230억억 원) 규모의 홍수 통제 사업을 독식했다고 폭로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미완성이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홍수 방지 사업과 연루된 의원들에게 전달될 돈이라고 주장되는 현금 다발이 탁자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모습은 청년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여기에 비리에 연루된 자들의 가족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초호화 생활을 과시해 온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필리핀 국민들의 박탈감과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다.
이번 시위는 과거의 저항 정신을 소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필리핀 국립대는 1970~80년대 마르코스 독재에 맞서 싸웠던 학생 운동의 중심지였다. 당시 학생이었던 레이먼드 마카파갈 교수는 "2001년 부패한 에스트라다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강의실을 나섰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오늘 나는 내 학생들에게 시위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고, 그들의 뜨거운 반응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시위는 1986년 마르코스 독재를 무너뜨린 '피플파워'의 상징적인 장소인 EDSA 성당에서도 열렸다. 시민단체 '일어서라 필리핀'이 주최한 이 집회는, 부패에 맞서 싸웠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