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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연의 오페라산책]새로운 형상의 우리 음악극 ‘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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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8. 17. 17:34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작...희생자이자 피해자인 심청의 서사
2025 소리축제 개막공연-국립창극단 심청 (2)
2025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공연 '심청'의 한 장면. /전주세계소리축제
2025년 전주세계소리축제의 개막 공연은 국립극장과 공동 제작한 판소리극 '심청'이었다.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한 작품으로 유명한 '심청전'은 우리 창작 오페라에서도 '춘향전'과 더불어 최다 창작 빈도수를 기록하고 있다. 심청의 이야기는 판소리 5마당 중 가장 비극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춘향에게 강요된 사회적 억압이 절개라는 열녀 프레임이었다면, 심청에게는 효녀 프레임의 구속이 있었다. 어린 소녀인 심청은 아버지와 주지 스님 등에 의해 인신 공양을 강요당한다. 그를 제물로 바친 뱃사람들이 대상으로 필요로 한 것은 반드시 순결한 소녀의 살아있는 육신이었다.

그동안 '심청전'은 아버지를 위한 딸의 숭고한 희생과 연꽃을 타고 환생해 왕비가 되는 심청의 인생 역전 서사를 통해 많은 교훈과 감명을 주는 작품으로 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지난 13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무대에 오른 이번 작품에서는 이 순결한 소녀의 살아있는 육신을 중심으로 한 강한 메시지의 표출이 무대를 지배했다.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희생양'(Le Bouc Emissaire, 1982)에서 '신화에 등장하는 인신 공양과 같은 희생 제의는 희생물에 대한 집단 살해의 기록인데도 불구하고 박해자의 시선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희생자는 때로는 죽어 마땅한 자나 아니면 숭고한 자원자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판소리극 '심청'도 이러한 시선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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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공연 '심청'의 한 장면. /전주세계소리축제
심청은 여러 개의 사회적 억압이 중첩된 존재다. 여성이자 미성년이며, 빈민에, 소외계층이다. 연출을 맡은 요나 킴은 심청의 이러한 배경을 9장의 구성으로 하나하나 집요하게 해체해 관객에게 디밀었다. 그간 '심청전'을 아름답게 포장해 온 효행의 미덕이나 판타지적 요소를 모두 제거해 버리고 어린 소녀에게 가해진 수많은 폭력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이다. 이런 잔혹한 현실을 꼼짝없이 앉아서 목도해야 했기에 공연 내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 또한 연출이 의도한 바일 수 있다. 예측대로, 이 작품에서 심청은 환생하지 않는다. 왕비가 되어 신분 상승하는 해피 엔딩은 더더욱 없었다. 연꽃은 그를 태운 꽃가마가 아닌, 짓밟힌 존재로서 나약한 심청을 상징하며 바닥에 나뒹군다. 마지막에 겨우 눈을 뜬 심 봉사가 본 것은 만신창이가 된 딸의 투신과 추락이다.

기존과는 다른 파격적 설정이 낯설 법도 하건만 국립창극단 단원들은 빼어난 소리와 연기력으로 극의 비극성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1부를 이끌어간 심청 역할의 김우정, 2부의 중심이 된 심 봉사 역할의 유태평양은 처절한 음색을 유연하게 내지르며 인물의 고통과 내적 갈등을 훌륭히 표현했다. 뺑덕어멈 역할의 이소연, 노파 심청을 맡은 김미진도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살렸다. 특히 노파가 된 심청은 원작에 없는 인물이지만 극 전체의 해설자로 든든한 중심 역할을 했다. 6개의 북을 가지고 타악의 느낌을 강조한 악단은 바이올린, 첼로, 베이스 등 서양 현악기 무리를 적재적소에 사용해 극적인 고양감을 고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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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공연 '심청'의 한 장면. /전주세계소리축제
헤르베르트 무라우어의 상징적이면서도 조형미 넘치는 무대디자인과 팔크 바우어의 섬세한 의상 역시 이제껏 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작품의 탄생을 보여줬다. 다만, '심청전'의 클라이맥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범피중류' 대목이 다소 평면적으로 그려진 것은 아쉽다. 변화하는 장단 등 음악적으로 이 부분이 주는 긴장감이 지대했던 것에 비해, 조명 등 시각적으로도 보다 강한 인상을 남길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빈번하게 나오는 라이브캠의 영상을 비롯해, 등장인물의 동작이나 의상, 소품 등에 너무 많은 알레고리를 넣고자 한 것도 다소 산만하게 여겨진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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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공연 '심청'의 한 장면. /전주세계소리축제
공연 뒤 만난 김희선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은 "심청전의 음악적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변형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질료를 그대로 두고서 새로운 형상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가리켜 창극이 아닌 판소리극으로 이름 붙인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심청은 다시 만난 아버지에게 한 맺힌 대사를 토해낸다.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마지막 9장에서 심학규는 비로소 눈을 떴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았을 현실이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단국대 교수

손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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