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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유교를 국교로 삼은 중화 제국의 간지(奸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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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7. 09. 14:57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45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옛날 송(宋)나라에서 한 농부가 어느 날 우연히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은 토기를 잡고선 다시는 밭을 갈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날마다 토끼가 다시 와서 그 그루터기에 또 부딪혀 죽기만을 기다렸다.

'한비자(韓非子)' 오두편에 나오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다. 복고적인 유생(儒生)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이 고사 속엔 법가의 역사관이 압축되어 있다. 전국시대 말기 한비자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질서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 질서란 새롭게 도래하는 통일 제국의 시스템이었다. 바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도입한 군현제(郡縣制)를 이른다.

◇ 법가는 고대 중국의 근대 사상

중화 제국의 장기 존속 비결이 법가의 군현제(郡縣制)와 유가의 이념을 결합한 중화 제국 특유의 하이브리드(hybrid) 시스템에 놓여 있다면 무리한 주장일까? 모든 학자는 단순화의 위험을 경계하나 때론 가장 단순한 설명이 가장 옳을 수 있다. 다음 세 가지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다.

1) 중화 제국의 제도적 골격은 진시황과 그의 재상 이사가 설계했지만, 2) 한나라 이후 진시황과 이사를 역사의 악인으로 전락했고, 3) 법가(法家) 사상 대신 유가(儒家) 사상이 중화 제국의 국가이념으로 채택됐다. 이 세 가지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에 외계인 미도가 따져 물었다.

"중화 제국의 황제들은 대대로 법가의 제도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면서 법가 대신 유가 경전을 국서(國書)로 삼아야만 했을까요? 대체 왜 법가 이론을 제창한 관중(管仲), 상앙, 한비자, 이사(李斯) 등은 비판하면서 공자(孔子), 맹자(孟子)와 같은 유가 사상가들은 칭송했을까요?"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를 지향한 법가 이념은 전국시대 말기의 근대(近代, modern) 사상이었다. 서주의 분봉 제도를 철폐하고 봉건적 전국시대를 종식한 법가 제현(諸賢)은 근대화 혁명을 이룩한 혁신적 사상가들이었다. 법가 사상가들은 유가 이념을 시대착오적 몽상이라 여겼다.

진시황은 다수 제후국이 공존하는 고대의 분봉제를 해체하고 전국 모든 지역을 하나의 행정망으로 묶었다. 그는 전국을 대략 36~48개 정도의 군(郡)으로 나눈 후, 그 아래 단계에 1,000개 이상의 현(縣) 정부를 설치했다. 과거엔 봉건 제후들이 세습 군주로서 통치하던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해서 다스리는 새로운 행정 체제였다.

진시황의 동상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시황의 동상
◇ 군현제에 반하는 유교의 봉건 제도

상식적으로 군현제는 유가의 이념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가 없는 이단의 통치 모델이다. 유가 경전에 따르면, 삼황오제가 통치하던 먼 옛날엔 만방(萬邦), 곧 1만 개의 나라들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1만 명의 봉건 제후가 삼황오제의 지도 아래서 각자의 영지를 세습 군주로 잘 다스렸다는 신화다.

하(河)나라 최후의 폭군 걸(桀)을 물리치고 탕왕(湯王)이 상(商)나라를 세웠을 땐, 고작 3000개의 제후국만 남아 있었다. 다시 550여 년이 지나 흉악한 독재자 주(紂)가 출현하자 문왕(文王)과 그의 아들 무왕(武王)은 주변 제후국을 이끌고서 상나라를 치고 주(周)나라를 열었다. 무왕이 단명하자 주공은 왕위에 오른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7년간의 섭정(攝政)을 펼쳤다.

주공은 '삼감(三監)의 난(亂)'을 진압하고 서주(西周)의 태평성세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주공이 확립한 이 새로운 질서는 고대 성왕의 황금기엔 미치지 못했지만, 후대 공자(孔子)를 위시한 유생들은 주공이 소강(小康)을 이뤘다고 칭송했다. 주공이 이룬 소강의 태평성세에는 천팔백국(千八百國)이 주(周)나라 왕실을 보위하며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주(周) 왕실은 천팔백국이 다들 사이좋게 서로를 돕고 보살피며 형제국들처럼 공생했다.
공자(孔子)의 초상
유교의 아이콘 공자(孔子)의 초상. 6세기 오도현(&#21556;道玄)의 작품
◇ 중화 제국은 황제와 호족의 동업(partnership)

춘추·전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서주 시대의 봉건적 이상은 이미 무너졌다. 동주(東周) 시대는 침략전쟁과 대량 학살로 점철된 참혹한 시기였다. 동시에 상공업이 발달하고 영토국가가 출현한 역사적 격변기였다. 진시황은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전대미문의 신질서를 확립한 제세(濟世) 영웅이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진시황 이전을 선진(先秦) 시대라 부른다. 진 제국의 출현은 농경이 발생한 이래 수천 년 유지돼 온 봉건(封建) 체제를 종식한 중국사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군현제를 계승한 후대의 황제들은 진시황을 역사의 죄인이라 비판했다. 대체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 이유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선 우선 황제 중심의 역사관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형식적으로 황제는 중앙정부에서 최고의 권력을 독점했지만, 결코 혼자의 힘만으론 큰 제국을 다스릴 수 없었다. 지방 사회는 한(漢)의 호족(豪族), 당(唐)의 권문세족, 송(宋)·명(明)의 사족(士族)과 같은 지방 엘리트의 활동 공간이었다. 바로 그들이 유가 경전을 배우고, 익히고, 연구하고, 주해(注解)했던 유생(儒生)들이었다.

지방 유생들로선 중앙정부의 과도한 간섭과 정치적 억압에 맞서기 위해 유가 경전을 이념적 방패로 삼았다. 유가 경전에는 중앙집권적 관료행정 체제가 이상적 제도가 아니라 기껏 제국 유지를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반제국적이며 반독재적인 지방 분권과 향촌 자치의 이념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지방 유생과 권문세족은 유가 경전을 전면에 내세워서 과도한 권력 집중과 전횡을 막는 이념적 근거로 삼을 수 있었다. 유가 경전은 바로 그들의 성경(聖經)이었다.

황제로선 지역을 장악한 유생 엘리트의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지 않고서는 광활한 영토를 통치할 수 없었다. 제국적 통합력을 제고하기 위해선 반드시 지역 맹주나 지방 호족과의 이념적 연대가 필요했다. 만인 위에 군림하는 황제로선 전일적 지배 체제를 강조하는 법가 이념 대신 봉건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유가 이념을 국교로 삼아야만 지방 엘리트를 포섭할 수 있었다. 유가 경전은 고대 성왕의 봉건적, 지방분권적, 향촌 자율적 통치 체제를 이상화하기 때문이다.

중화 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예외 없이 진시황의 군현제를 계승했지만, 군현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봉건제를 칭송하는 유가 경전을 국교로 채택했다. 중화 제국은 결국 중앙정부와 지방 엘리트의 유기적 통합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행정 체제였다.

진시황은 중국사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인물이고, 이사는 천하통일의 청사진을 그린 법가 계열의 재상이었다. 진시황과 이사의 만남이 없었다면 전국시대의 분열은 종식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진시황과 이사의 만남이 없었다면 천하는 통일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진 제국은 15년 만에 붕괴했고, 이후 등장한 한 제국은 유교를 국교로 삼았다. 그 점에서 중화 제국의 장기 존속 비결은 바로 법가와 유가의 결합에 놓여 있었다. 법가의 제도와 유가의 이념이 뒤섞일 수 없었다면, 이후 중국은 군웅(群雄)이 할거하는 여러 국가로 분열되거나 로마제국처럼 길어야 수백 년 안에 분열되어 사라졌을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법가와 유가의 결합은 2000여 년의 세월 제국적 통합을 가능하게 한 중화 문명의 간지(奸智)였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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