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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시작은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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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7. 14. 08:16

연극'춘섬이의 거짓말'...25일 성수아트홀 초연
억압과 차별 속 삶을 지켜낸 여성들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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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폭력보다 강한 목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조선의 그늘 아래, 이름 없이 사라진 여성들의 삶에 귀 기울여온 극단 모시는사람들이 여름 무대 위에 다섯 번째 여성 서사를 펼쳐낸다. 2025년 신작 '춘섬이의 거짓말'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기원을 되짚으며, 작가적 상상력으로 채운 '홍길동의 어머니'라는 공백을 탐색한다.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극이 아니라, 거짓말이라는 도구로 진실을 품어낸 여성들의 연대를 통해 지금 이 시대의 우리에게 묻는다. 36년간 시대와 호흡해온 모시는사람들의 대표 레퍼토리 '조선여자전'의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저항의 기록이다.

극작과 연출은 '심청전을 짓다'로 제43회 서울연극제 우수상과 제20회 고마나루국제연극제 대상을 수상한 김정숙이 맡는다. 그는 15년간 '조선의 여자들'을 관통하는 다섯 편의 이야기를 완성해왔으며, 이번 무대는 그 여정의 종착지다. 2024년에는 '조선여자전' 희곡집이 정식 출간되었고, 신작 '춘섬이의 거짓말'이 2025년 성수아트홀에서 초연된다. 숙연함과 유려함, 그리고 치열함이 공존하는 이 서사는 오늘의 무대 위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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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섬이의 거짓말' 연습 현장. 공연 전 배우들이 주요 장면을 맞춰보고 있다. / 사진 극단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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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섬이의 거짓말' 연습 현장. 공연 전 배우들이 주요 장면을 맞춰보고 있다. / 사진 극단모시는사람들
극의 주인공 '춘섬'은 대대로 종살이하던 집안의 딸로, 숯 굽는 개불이와의 사랑 속에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사랑의 결과로 생긴 뱃속의 아이는 곧 춘섬에게 남겨진 선택지를 재단한다. 그녀는 양반가의 씨받이로 팔릴 위기에 놓이고, 결국 주인의 욕망 속에 버려진 존재가 된다. 이처럼 삶의 자리에 폭력과 억압이 먼저 도착한 현실 속에서, 춘섬은 '거짓말'을 짓는다. 그리고 이 거짓말은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아이를 지키고 스스로의 운명을 다시 쓰기 위한 창조적 결단으로 기능한다. 그녀는 "춘섬이로도 내 맘대로 못살고, 별당 댁도 넘의 뜻이지만 너는 내 마음이야"라는 대사를 통해, 타인의 규정 속에서도 단 하나의 주체성을 선언한다. "이건 너하고 나하고 짓는 팔자여"라는 말에는, '삶을 짓는 자'로서의 어머니가 선 자리의 철학이 담겨 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축은 춘섬 혼자만의 투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춘섬의 곁에는 함께 거짓말을 엮어내는 여성들이 존재한다. 마님의 몸종 쫑쫑이, 찬모 딸끝네, 춘섬의 어머니는 각자의 방식으로 춘섬의 결정을 돕고, 작지만 확실한 연대를 보여준다. 이는 '여성들 사이의 상생'이라는 고전적 가치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연대는 억압과 침묵의 질서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전략이자 생존을 넘어선 존재의 존엄을 위한 선택이다. 홍대감댁 뒷마당이라는 폐쇄된 공간은 이들 여성들이 고통을 공유하고 생명을 품어내는 비의적 장소로 전환된다. 거짓말이 생명을 살리고, 진실을 지킨다. 이처럼 연극은 오래된 세계에서 지금 이 순간으로 건너온다.

작품은 '모성의 존엄'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서사를 전개한다. 김정숙 연출은 저출산 문제를 다룬 BBC 다큐멘터리에서 "우리 어머니가 불행해 보였기에, 나도 어머니가 되기 싫다"는 한국 여성들의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춘섬은 어머니가 되기를 자처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강요된 역할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켜내기 위한 주체적 결단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어머니의 위엄'은 춘섬이의 작은 거짓말 속에서 되살아난다. 이 작품은 "모성은 원래 위대하다"는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그 위대함이 어떻게 부당함과 대면하면서 만들어지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결국 홍길동이라는 '이상적 인간'의 서사는 어머니 춘섬의 작고도 거대한 선택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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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섬이의 거짓말' 연습 현장. 공연 전 배우들이 주요 장면을 맞춰보고 있다. / 사진 극단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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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섬이의 거짓말' 연습 현장. 공연 전 배우들이 주요 장면을 맞춰보고 있다. / 사진 극단모시는사람들
이번 공연은 극단 모시는사람들이 꾸준히 지켜온 장인 정신과 배우 중심의 앙상블 연기를 바탕으로 완성된다. 특히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활약해온 신문성과 김현은 각각 동백꽃 필 무렵, 재벌집 막내아들 등을 통해 이름을 알린 배우들로, 이번 공연을 통해 선달과 매파 역으로 연극 무대에 복귀한다. 오랜만에 연극이라는 본진으로 돌아온 이들은 극단의 배우들과 함께 짜임새 있는 앙상블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마당극패 우금치의 대표 배우 성장순이 출연해 이번 무대에 생동감을 더한다. 이번 무대에 함께하는 정연심은 섬세한 표현력으로 극의 정서를 한층 깊이 있게 채워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다양한 지역과 매체를 아우른 배우들의 호흡은 '춘섬이의 거짓말'이 동시대의 정서를 입체적으로 담아내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36년 넘게 "한 번 공연하고 사라지는 작품이 아닌, 함께 호흡하며 성장하는 무대"를 만들어온 극단 모시는사람들. 대표작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으로 전국 40만 관객을 돌파한 이들은, 어린이극 '강아지똥'을 24년 연속 무대에 올리며 2024년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베스트 쇼 상을 수상했다. 여성 서사를 꾸준히 탐색해온 '조선여자전' 시리즈는 2013년 '숙영낭자전을 읽다'를 시작으로, '심청전을 짓다', '소녀', '꽃가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관객의 지지를 받아왔다. 특히 '심청전을 짓다'는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 초청되는 등 국외 무대에서도 성과를 이뤘다. 이번 '춘섬이의 거짓말'은 그러한 여정을 총결산하는 마지막 장으로, 조선여성사의 맥락을 현대와 이어주는 귀중한 연극적 성과다.

"세상의 차별에 지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홍길동의 꿈은 어머니 춘섬이에게서 시작된다."는 제작 의도는 단순히 극의 배경을 넘어, 관객이 지금 이 사회에서 마주해야 할 현실과 겹쳐진다. 살아남기 위해 진실을 감춘 여인들의 이야기가, 결국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진실은 항상 당당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숨겨지고 왜곡되며, 누군가의 선택 속에 살아남는다. 그 선택이 누군가의 삶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아닌 하나의 희망이 된다.

'춘섬이의 거짓말'은 2025년 7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성수아트홀에서 공연된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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