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곤 감독, 들꽃영화상 수상작 시나리오 메이킹 북
'읽히는 영화’로서의 가능성
독립영화 제작 환경의 현실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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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중심에는 김 감독이 집필한 시나리오 <모래내 가족>이 있다. 제목 그대로 가족의 이야기지만, 그것은 단순한 가족 드라마나 자전적 서사는 아니다. 김 감독은 2018년 3월, 아버지를 떠나보낸 슬픔 속에서 조용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그리고자 한 세계는 자신만의 상처를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감정, 애도와 회복,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작고 복잡한 사회적 맥락들이었다. 그래서 <모래내 가족>은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누구에게도 정확히 귀속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기억을 건드리는, 정서적으로 조용하지만 묵직한 서사다.
김 감독은 이 시나리오를 완성한 뒤 한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영화로 만들기에는 너무 소소하고, 우울하며, 상업적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2022년, 들꽃영화상의 시나리오 부문 공모 소식을 접하며 다시 이 원고를 꺼내들었다. 이 공모는 오직 시나리오의 문학성과 영화적 가능성만을 기준으로 심사하는 방식이었다. 마침내 <모래내 가족>은 2023년 들꽃영화상에서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냉담했다. 수상 이후에도 영화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한 편의 영화가 겪은 좌절이 아니라, 지금 한국 영화계 전반이 처한 위기와도 깊이 연결된 일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계는 독립영화나 예술영화의 경우 기획조차 시작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김 감독의 <모래내 가족>도 그런 현실 앞에서 한동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영화로 완성되지 못하더라도, 독자와 이야기로 만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는 판단 끝에,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한 메이킹 북 출간을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진 않았습니다만'이라는 이름의 책이 탄생했다.
이 책은 단순히 시나리오를 활자화한 각본집이 아니다. 각 장면을 뒷받침하는 인물 노트와 캐릭터 분석, 작가의 창작 의도, 연출 구상 등 영화 제작의 전 과정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이른바 '시나리오 메이킹 북'이다. 김 감독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단순히 "이런 영화가 있습니다"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영화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설명한다. 영화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 모든 준비는 이미 시작되었고, 이 책은 그 창작의 증거물이다.
시나리오는 원래 읽기 쉬운 장르가 아니다. 감정이나 심리를 직접 묘사하지 않고, 대사와 지문만으로 인물을 전달한다. 연기자와 연출자가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여백이 많기 때문에, 일반 독자에게는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이런 시나리오의 '불친절함'을 의식하면서도, 독자가 이야기와 인물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친절한 해석과 구조 설명을 덧붙였다. 그 덕에 이 책은 시나리오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충분한 몰입감을 제공한다.
특히 이 책은 영화제작을 꿈꾸는 이들에게 교과서적인 가치를 지닌다. 들꽃영화상 오동진 위원장은 추천사에서 "이 책은 단순한 시나리오를 넘어, 인물의 행동 동기와 구조적 설계를 어떻게 짜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또 "스토리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방식, 즉 '왜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실질적인 통찰이 담겨 있다"며 "전국의 영화학도들에게 교재로 쓰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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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는 지금, 재편과 과도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말없이 대기 중인 수많은 이야기들일지도 모른다.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진 않았습니다만'은 그러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영화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기록되고 공유될 가치가 있는 작품임을 조용히 증명한다. 비록 상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한 편의 영화는 이미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 책은 그 첫 문을 여는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