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Advertisements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 100세 별세...블룸버그·WSJ·FT·닛케이·한델스블라트, 주요 경제매체들의 평가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3.asiatoday.co.kr/kn/view.php?key=20260622010007731

글자크기

닫기

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승인 : 2026. 06. 22. 23:59

구글 검색 선호 출처 추가 Google 검색에서 아시아투데이 기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s

Advertisements

S&P500 4배·실업률 3.8%…5기 연속 연준 이끌며 장기 확장 관리
블랙먼데이·헤지펀드 위기 방어…35억달러 구제와 '그린스펀 풋' 논란
자유시장 결함 인정에도 책임론 지속
Obit Alan Greenspan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사회 의장이 2005년 11월 3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연방의회에서 증언하고 있다./AP·연합
'마에스트로'로 불리며 18년 반 동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이끈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이 22일(현지시간)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1987년부터 2006년까지 5기 연속 재임하며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4배 상승·실업률 3.8% 최저를 기록하는 장기 호황을 관리했으나, 퇴임 2년 뒤 터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규제 실패 책임론에 직면하며 유산이 재평가됐다.

◇ 그린스펀, 18년 반 Fed 이끌며 S&P500 4배·실업률 3.8% 최저 관리

그린스펀 전 의장은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지명과 민주당 주도 상원의 인준을 거쳐 1987년 연준 의장직에 올랐다. 그는 2006년 초 퇴임까지 18년 반 동안 연준을 이끌었다.

재임 기간은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전 의장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길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닛케이)은 그의 5기 연속 재임이 처음이었다고 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그의 재임기가 1991년 3월 종료된 경기침체와 2001년 3월 시작된 경기침체 사이 10년 장기 확장과 겹쳤다고 보도했다.

이 기간 미국 경제는 연평균 3.5% 성장했다. 실업률은 평균 5.5%였고, 2000년 4월 3.8%까지 낮아졌다. 이는 당시 1969년 이후 최저였다.

S&P500 지수는 거의 4배 올랐다. 로저 퍼거슨 전 연준 부의장(1999~2006년 재임)은 그린스펀이 기술 발전이 생산성을 높여 인플레이션 없는 고성장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일찍 인식했다고 말했다고 블룸버그가 전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1970~1995년 생산성이 연 1.5%가량 늘었지만, 1995~2003년 증가율이 두 배가 됐다고 전했다.

그린스펀은 1994년 기준금리를 3%에서 1년 만에 6%로 두 배 올렸고, 1995년 세 차례 금리를 내리며 경기침체 없는 연착륙을 이끌었다. 그는 이를 재임 중 연준의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블룸버그와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가 1994년부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책 변경을 당일 발표하도록 했고, 정책회의 속기록을 5년 시차로 공개하는 투명성 개혁도 이끌었다고 전했다.

Obit Alan Greenspan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1987년 8월 11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사회 신임 의장으로 취임 선서를 마친 앨런 그린스펀을 축하하고 있다./AP·연합
PEOPLE-ALAN GREENSPAN/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사회 의장(왼쪽)이 1991년 7월 10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자신을 두 번째 임기의 연준 이사회 의장으로 지명한다고 발표한 뒤 발언하고 있다./로이터·연합
FILES-US-GREENSPAN-POLITICS-ECONOMY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오른쪽)이 1999년 1월 4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AFP·연합
◇ 그린스펀, 블랙먼데이·LTCM 위기 연이어 방어…'그린스펀 풋' 도덕적 해이 비판도

그린스펀 전 의장은 취임 두 달 만에 1987년 10월 블랙먼데이를 맞았다. 당시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는 22% 급락했다. 그는 금융시스템을 지원하기 위해 유동성 공급과 금리 인하를 약속했다.

FT는 시장 붕괴가 금융시스템에 장기 손상을 남기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1997년 아시아 통화위기 이후 예정된 금리 인상을 미뤘다. 그는 1998년 러시아 채무불이행 뒤 금리를 내렸고, 같은 해 미국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35억달러 구제 방안 마련에도 관여했다.

WSJ는 그가 1994년 멕시코 채무위기 이후 구제금융 마련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위기 대응은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이라는 별칭을 낳았다. 이는 연준이 투자자 손실을 막아주는 풋옵션(put option)처럼 작동한다는 시장 인식이었다.

블룸버그는 이 인식이 위험한 시장 행동을 더 안전하게 보이게 하는 도덕적 해이 논란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WSJ는 그린스펀이 1959년 이미 중앙은행이 경기순환을 길들였다는 믿음이 투자자 안일함과 위험 추구를 키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그는 연준을 비판한 자유시장론자였지만, 의장이 된 뒤 중앙은행의 위기 개입 권한을 적극 활용했다. 이 역설은 그의 별명인 '마에스트로'와 금융위기 이후 책임론을 함께 남겼다.

U.S.-FORMER FEDERAL RESERVE CHAIRMAN-PASSING AWAY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2009년 10월 1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다./신화·연합
◇ 그린스펀, 서브프라임 규제 거부·파생상품 자유화 고집…금융위기 책임론 직면

그린스펀 전 의장은 시장 자율 규제 신념을 바탕으로 금융산업 규제 강화에 반대했다. WSJ는 그의 시장 자기규율 신념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규제정책의 동력이 됐고, 결국 '아킬레스건'이 됐다고 분석했다.

FT는 그가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했던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의 대규모 폐지를 지지했다고 전했다.

그는 파생상품 규제 강화에도 반대했다. 그는 2003년 파생상품이 금융기관을 충격에 덜 취약하게 만들었고, 금융시스템을 더 탄력적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에드워드 그램리치 전 연준 이사(1997~2005년 재임)는 2000년 연준 감독관을 활용해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을 더 강하게 단속하자고 제안했는데, 그린스펀이 이를 거부했다고 FT·WSJ가 전했다.

WSJ는 2000년부터 그린스펀 퇴임까지 연준이 모기지(주택담보 대출) 관련 공정대출 위반 혐의로 법무부에 넘긴 금융기관이 3곳뿐이었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는 2005년 연준 회의록이 중앙은행 직원과 관리들이 주택 거품을 인식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그린스펀은 당시 주택시장 과열이 모기지 금리 상승으로 억제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2007년 은행 간 대출이 멈췄고,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위기가 폭발했다.

FT는 그가 퇴임한 지 조금 넘는 2년 뒤 연준이 베어스턴스 붕괴, 리먼브러더스 파산, 월가 구제와 전례 없는 통화완화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그는 닷컴 붕괴 뒤 디플레이션 방어 필요성을 명분으로 기준금리를 1%까지 낮췄지만, FT는 당시 미국 경제가 일본식 디플레이션 위험에 실제로 처했는지는 의문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84년 링컨 저축대부조합(Lincoln Savings & Loan)을 '재무적으로 강한 기관'이라고 옹호했지만, 이 기관은 몇 년 뒤 부실 부동산 대출로 무너졌고, 납세자에게 34억달러의 손실을 남겼다. 그는 1989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이를 예견하지 못한 데 대해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FILES-US-POLITICS-ECONOMY-GREENSPAN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1990년 7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연방의회에서 진행된 상원 은행·주택·도시문제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고 있다./AFP·연합
◇ 그린스펀 "70% 맞고 30% 틀려" 인정…전 연준 부의장 "통화 마에스트로, 규제는 해악"

그린스펀 전 의장은 2008년 의회에서 자유시장 철학에 "결함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출기관의 자기 이익이 주주 자본을 보호할 것으로 본 우리, 나 자신을 포함해, 충격적 불신 상태에 있다"고 밝혔다.

그는 금융위기조사위원회에서 "나는 70%는 맞았고 30%는 틀렸다"고 말했다고 블룸버그와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가 전했다.

앨런 블라인더 전 연준 부의장(1994~1996년 재임)은 그린스펀이 경제 운용과 연준의 고용·물가 책무 수행에는 '훌륭했다(terrific)'고 평가했다. 그러나 블라인더는 그에게 규제의 '맹점(blind spot)'이 있었다고 말했다고 FT가 전했다.

WSJ는 블라인더 전 부의장은 그의 규제 유산이 많은 해악을 낳았다고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재닛 옐런 전 연준 의장이 1994~1997년 연준 이사로 재직할 때 그린스펀의 제안에 반대하기가 위압적이었다고 증언했다고 전했다. 로런스 마이어 전 연준 이사도 자신이 회의 결과에 영향을 준 적이 있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블라인더 전 부의장과 리카르도 레이스 프린스턴대 교수는 2005년 논문에서 그린스펀을 대단히 성공한 의장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통화정책이 개인화되고 '개인숭배(cult of personality)'에 가까워졌다고 지적했다.

닛케이는 케빈 워시 현 연준 의장이 2026년 5월 취임 선서식에서 그린스펀이 연준 의장직에 무엇이 요구되는지 처음 보여줬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닛케이는 그가 여러 위기를 넘기며 '마에스트로'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리먼 위기로 이어진 주택 거품을 막지 못해 비판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린스펀은 1926년 3월 6일 뉴욕 워싱턴하이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줄리아드음악원에서 공부한 뒤 헨리 제롬 밴드에서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연주하며 주급 6달러를 받았다. 그는 첫 부인 조앤 미첼을 통해 자유시장 작가 아인 랜드를 만났다. 랜드는 그를 진지한 태도와 검은 정장 때문에 '장의사(the Undertaker)'라고 불렀다.

FT는 그가 랜드의 영향으로 자유지상주의 주변부(libertarian fringe)의 일원이 됐다고 전했다. 그는 이후 월가 경제 컨설턴트와 워싱턴 권력 핵심을 거쳐 연준 의장이 됐고, 성장 안정과 금융위기 책임론을 함께 남긴 인물로 기록됐다.
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Advertis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