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일상, 현실과 상상의 경계 허물기
관객 참여형 환경 서사의 가능성과 과제
|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생태학적 개념을 무대 위로 호출한 이 작품은, 기후위기 시대의 인간 존재를 물리적 공간과 철학적 서사, 그리고 관객 참여라는 삼중 구조 속에 풀어낸 보기 드문 예술적 시도였다. 공연은 실험적인 구성과 연출, 친환경 제작 방식까지 포괄하며 연극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
'인류세 프로젝트'의 1부는 종로구 안국역 인근 현대원서 공원을 배경으로 진행된 이동형 로드씨어터 형식의 야외 공연이다. 관객은 입장과 동시에 헤드셋을 착용한 채, 공원 곳곳을 자유롭게 산책하며 이동 경로 위에 덧입혀진 공연을 체험했다. 래퍼 마이크로닷이 사운드 디자인에 참여한 이번 공연은, 자연의 소리와 도시의 일상, 배우들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중첩되는 공간-서사 복합체로 기능했다.
이러한 방식은 현대 공연예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머시브 씨어터' 형식의 전형을 따른다. 이머시브 씨어터는 전통적인 무대-객석 구분을 해체하고, 관객이 작품 세계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공연 방식을 말한다. 관객은 수동적 관람자가 아니라 극의 일부이자 행위자로서 작품과 상호작용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영국 펀치드렁크(Punchdrunk) 극단의 'Sleep No More'(2003)가 있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맥베스'를 모티브 삼아 호텔 전 층을 무대화하고, 관객이 자유롭게 공간을 탐색하며 서사를 조각처럼 체험하게 했다. 이후 이머시브 씨어터는 연극뿐 아니라 전시, 퍼포먼스, VR 콘텐츠까지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었다.
'인류세 프로젝트'에서도 이러한 원칙은 철저히 관철됐다. 안내자의 목소리는 "여기는 어디일까요? 서울? 안국역 근처 공원? 자, 잠깐만요. 눈을 감아보세요. 우리는 이제 함께 상상의 모험을 떠날거에요"라고 한 뒤, 관객은 점차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체험 속으로 진입한다. 인간의 무의식, 자연의 숨결, 배우의 퍼포먼스가 뒤섞이며 관객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특히 이번 공연은 '슬로우 드라마트루기(Slow Dramaturgy)'라는 창작 전략을 통해, 빠른 소비와 효율을 강요받는 일상에서 벗어나 일시적 정지와 감각의 회복을 유도했다. 이는 극장이라는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하나의 '무대'로 삼는 실험이기도 했다.
|
2부는 북촌 창우극장에서 열린 실내 공연으로, 에피소드 3부터 5까지 총 세 편의 단막으로 구성되었다. 공원이라는 열린 공간과는 달리, 실내극은 보다 명확한 극구조와 배우의 대사 중심으로 인류세의 철학적, 윤리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에피소드 3 '지구 종말 후 연극인들'은 지구 멸망 이후 우주 어딘가에서 살아남은 연극인들이 인간 문명을 회상하며 전개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공연이다. 연극인들은 환경 파괴의 흔적을 추적하며, 인류가 놓쳐버린 감각과 책임을 되새긴다.
에피소드 4 '지구, 최후의 선택'은 '인간이 된 지구'라는 메타포를 중심에 둔다. 인간에 의해 착취당한 지구가 마침내 반격을 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는 이 작품은, 인간 중심주의를 전복시키는 구조를 통해 생태주의적 관점을 강화한다.
가장 실험적인 구성은 에피소드 5 '베타 세대, 배아들의 토론'에서 발견된다. 태어나기 직전의 네 개의 배아가 착상 여부를 두고 치열하게 찬반토론을 벌이고, 관객이 '배심원'이 되어 이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형식은 관객 참여형 연극의 정점을 보여준다. 관객은 질문을 던지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결과에 직접 책임을 지는 주체로 변화한다.
◇ 한국에서의 이머시브 씨어터 시도들과의 비교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도 대학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이머시브 형식의 소극장 공연들이 등장했다. 관객이 공간을 이동하며 극의 서사를 따라가는 실험적 시도가 이어졌지만, 주로 한정된 실내 공간을 무대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도시 전체나 대규모 공공공간을 활용한 사례는 아직 드문 편이다.
'인류세 프로젝트'는 이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공공공간을 해석 가능한 무대로 전환하는 동시에, 환경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이머시브 형식으로 풀어낸 것은 기존 한국형 이머시브 연극과 차별화된 지점이다. 또한 대부분의 국내 이머시브 연극이 관객을 '탐험자'로 설정하는 데 그친 반면, '인류세 프로젝트'는 관객을 '결정권자'로까지 끌어올려 서사의 중요한 일부로 만든 점에서 진일보한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
'인류세 프로젝트'는 공연의 내용뿐 아니라 제작 방식에서도 '인류세적 태도'를 견지했다. 일회용 소품 제작을 지양하고, 폐카페 원두 봉투, 폐플라스틱, 페트병 등을 소품으로 활용함으로써 연극 자체가 생태적 전환의 메시지를 구현하는 하나의 매체가 되도록 했다. '핑크치킨 프로젝트'나 '향유고래' 장면은 이러한 재료들이 오히려 미적 경험으로 승화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무대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기술과 화려함으로 무장된 무대예술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해체하는 공연 형식이야말로 오늘날 연극이 감당해야 할 시대적 책무라는 자각이기도 하다.
◇ 질문을 남긴 연극 - 연극은 과연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공연 종료 이후 관객들로부터 쏟아진 피드백은 이 공연의 실험이 일정 수준 이상의 공감을 이끌어냈음을 보여준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공연", "공연을 보는 내내 준비한 이들의 진심이 전해졌다"는 관객 후기들은 단순한 '예술적 완성도'를 넘어, 질문을 던지는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재확인하게 했다.
TCF엔터테인먼트는 "'인류세 프로젝트'는 예술이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촉매제임을 보여주려 했다"며 "앞으로도 예술과 사회, 자연의 접점을 찾아가는 공연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인류세 프로젝트'는 단지 환경 문제를 언급한 연극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의 감각을 깨우고, 인간 중심적 사고에 균열을 내며,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묻는 실험이자 선언이었다. 이 연극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함께 반응한 관객이 있었기에,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해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