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Advertisements

‘과거와 현재의 대화’ 조계종 강남 봉은사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3.asiatoday.co.kr/kn/view.php?key=20260926010009170

글자크기

닫기

황의중 기자

승인 : 2026. 09. 26. 23:51

구글 검색 선호 출처 추가 Google 검색에서 아시아투데이 기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s

Advertisements

신라 견성사서 출발 조선 봉은사로 자리잡아
승과, 추사의 판전, 을축 대홍수 등 유적 남아
생전예수재 등 전통 현대와 만나다
clip20260926100804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신라 원성왕 10년인 794년 연회국사가 세운 '견성사(見性寺)'를 기원으로 하는 천년고찰이다./사진=황의중 기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일대는 코엑스몰·무역센터 등 고층 빌딩이 늘어선 21세기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곳이다. 이 빌딩 숲 사이를 조금만 지나면 바로 옆에 녹지가 펼쳐진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수도산(修道山) 자락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다.

봉은사는 794년 신라 원성왕 10년 연회국사(緣會國師)가 강남 삼성동 일대에 세운 '견성사(見性寺)'에서 기원했다. 견성사는 고려시대에도 그 이름을 이어가다 1498년 조선시대 성종의 무덤인 선릉을 지키고 명복을 비는 능침사찰(陵寢寺刹)로 지정되면서 '왕실의 은혜를 받든다'는 뜻으로 봉은사(奉恩寺)라고 불리게 된다. 1562년 문정왕후 때 중종의 능(정릉)이 선릉 옆에 오면서 그 자리에 있던 봉은사는 코엑스 옆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한다.

봉은사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조선 문정왕후 때부터다. 봉은사는 불교를 숭상했던 문정왕후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전국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됐다. 이로써 봉은사는 명맥이 끊기려던 조선 불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던 허응당 보우스님(1515~1565)은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폐지됐던 승과(僧科) 제도를 다시 시행한다. 그 결과 승려의 질이 확보될 수 있었고, 서산·사명대사 고승들이 배출돼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나라를 지킨 승병(僧兵)이 탄생할 수 있었다. 유생들에게 문정왕후는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지만, 뜻하지 않게 조선 왕조와 한국불교에는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코엑스 입구 자리는 승과평이라고 해서 승과를 치르던 벌판이었다. 지금은 표지석만 남았지만 당시 승과의 위용을 짐작게 한다.

봉은사에 오면 꼭 보고 가야 하는 곳이 판전(板殿)이다. 판전은 불경을 새긴 목조 경판을 모신 곳으로 1855년(철종 6년) 영기스님이 중심이 돼 '화엄경소초' '금강경' '아미타경' 등 조선 후기에 판각된 총 15종의 귀중한 대승불교 경판들을 옛 방식 그대로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화엄경소초의 경우 전권 경판이 온전히 보존된 유일한 곳이다. 경전의 위신력 때문이었을까. 판전은 1939년 대화재와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았다. 봉은사에 있는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판전의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 서예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마지막 작품이다. 판전 글씨 옆에는 "七十一果病中作 (71세 된 과노(果老)가 병중에 쓰다)"라고 쓰였다. 여기서 '과'는 추사의 별호다. 그는 이 작품을 쓰고 사흘 뒤 임종한다. 임종 직전에 남긴 글씨지만 완성된 그의 서체가 현판에 생생히 남아 우리를 맞고 있다.

봉은사는 근현대 역사에도 족적을 남겼다. 1925년 한강 유역 지도를 바꿨다는 을축 대홍수 때 봉은사 주지였던 청호스님의 미담이 그중 하나다. 을축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 현 잠실 일대 주민들은 나무 위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청호스님은 사찰의 전 재산을 털어 배를 구하고 위험에 주저하는 뱃사공들에게 보상금을 걸어 구조대를 직접 이끌었다. 그렇게 구해진 목숨이 708명에 달한다. 목숨을 건진 수재민들은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성금을 모아 봉은사에 비석을 세웠다. 봉은사 진여문(일주문) 옆 부도전에 있는 '주지 나청호 대선사 수해 구제 공덕비'가 그것이다.

2000년 이후에 봉은사는 명사들이 방문하는 곳으로 유명해진다. 명진스님(1950~2026)이 봉은사 주지로 있던 시절(2006~2010)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몇 차례 찾아와 조언을 듣던 일화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봉은사는 조계사와 더불어 서울의 대표 사찰인 탓에 조계종 총무원장이 외빈을 맞는 장소이기도 하다.

봉은사에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대표적인 모습은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를 통해 볼 수 있다. 생전예수재는 죽은 사람의 넋을 기리는 일반적인 천도재(영산재, 수륙재 등)와 달리, 살아있는 사람이 자신의 사후 극락왕생을 위해 생전에 미리(預) 공덕을 닦는(修) 불교 의례로 202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봉은사 생전예수재의 유래는 19세기 조선시대 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에 기록된 경기도 광주(현재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서 행해진 윤달 풍습에서 찾을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윤달을 만나면 장안의 여인들이 다투어 와서 불공을 드리며 불전에 돈을 놓는데, 윤달이 다 가도록 끊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조상 제사를 크고 화려하게 지내는 것이 사회적 체면과 관련 깊던 조선시대에서 크고 화려한 생전예수재는 유력가 집안에서는 매력적었던 셈이다. 현재는 그 의미를 확장해 49일간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육바라밀을 닦는 수행으로 신도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현대적 재해석은 오늘날 봉은사의 강점이다. 여전히 선방(禪房)이 있고 여름철·겨울철 안거 전통을 지키면서도, 2026년 4월 국제선명상대회 등을 통해 현대 명상과도 소통한다. 이 때문에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남아시아센터장 강성용 교수는 "전통을 현대화하는 연구에 가장 적합한 표본을 제공하는 곳"으로 봉은사를 꼽았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할렛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봉은사야말로 이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다. 멀리 외국 명소를 찾기 전에 강남 한복판에 있는 살아있는 역사를 체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
_17a5717
도심 빌딩 불빛 속 봉은사 전경./제공=봉은사
clip20260926100934
코엑스 입구 자리에 있었던 승과평 터 표지석. 과거 조선 성종 때 봉은사 앞 코엑스 입구 자리에서 승과를 시행했다./사진=황의중 기자
clip20260926100946
판전 현판. 조선 후기 최고의 문인서화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남긴 생애 마지막 글씨로, "七十一果病中作 (71세 된 과노(果老)가 병중에 쓰다)"로 과는 추사의 별호로 별세 사흘 전 쓴 유작이다./사진=황의중 기자
판전 저장고 모습
판전에 보관된 경판. 이곳에는 조선시대 제작된 화엄경소초 목판 중 유일하게 전권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제공=봉은사
MYB_0291
판전에 보관된 목판./제공=봉은사
clip20260926101013
을축 대홍수 때 봉은사 주지 청호스님의 보살행을 칭송하는 공덕비. 홍수 4년 뒤인 1929년, 목숨을 건진 잠실·부리도 등의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것이다./사진=황의중 기자
생전예수재 회향 전경
봉은사 대웅전에서 봉행되는 생전예수재. 봉은사 생전예수재는 2025년 7월 국가무형유산 신규 종목으로 지정됐다./제공=봉은사
clip20260926101140
봉은사의 명물 미륵대불./사진=황의중 기자
황의중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