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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남의 이름은 이미 국내외 정상외교의 공간에서 익숙하다.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시각화한 그의 작업은 이번에도 경직된 외교 무대에 '심리적 온도'를 더하는 역할을 맡는다. 외교심리학자들이 말하듯, 대화의 질은 장소가 만든다. 차가운 회담장보다 따뜻한 공간에서 말문이 열리고,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가 예술의 이미지 안에서 공감대를 찾는다. 이번 APEC 2025 정상회의의 첫 대화 역시 이이남의 빛으로 시작된다.
◇ 경주의 회담장, 예술이 만든 명상의 공간
정상들이 처음 발을 들이는 경주화백컨벤션센터 정상회의장에는 이이남의 대표작 '고전회화-해피니스'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스틸 아트와 미디어아트가 결합된 병풍 형식으로, LED 패널과 잔잔한 사운드가 신라의 미감을 되살린다. 디지털로 구현된 동양의 산수화는 기술문명이 만들어낸 인공의 빛과 동양적 사유의 고요가 맞닿는 지점에서 관객에게 찰나의 명상을 선사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동시에 마주하는 이 공간은 회담을 앞둔 정상들의 긴장을 풀고, 대화의 온기를 싹트게 한다.
그 옆에는 '신-몽유도원도'가 설치된다. 안평대군의 꿈을 디지털 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이상향을 향한 인간의 본성을 빛과 영상으로 구현했다. 국가 지도자들이 자신의 비전과 꿈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장치로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도원의 풍경 속에서 사라진 이상과 회복된 희망이 교차한다. 예술은 그렇게 정치적 언어를 넘어, 인간의 본능적인 염원을 깨운다.
이어지는 '금강내산'은 남북을 잇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디지털 기술로 복원하며, 서로 닿을 수 없던 산과 산을 연결했다. 한 산 위에 남과 북의 상징 건축물이 공존하는 장면은 '분단'을 넘어 '공감'으로 나아가는 예술의 힘을 시각화한다. 사계절이 순환하는 산수의 영상에는 화해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믿음이 흐른다. 이 작품은 남북정상회담 당시 평화 메시지를 전했던 작가의 경험이 확장된 형태로, APEC 회의장 안에서 '화합의 미래'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김홍도의 '묵죽도'는 묵향의 절개를 디지털 바람으로 되살린다. 먹의 농담이 만들어낸 고요한 풍경 위로 보이지 않는 바람이 스친다. 그 바람은 협력과 소통의 메타포로 읽힌다. 고전 회화에 디지털 생명을 불어넣는 이 작업은 시대를 잇는 대화의 다리로 기능하며, 전통과 현대의 예술이 만나는 순간을 완성한다.
이이남의 작품들은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그 흐름은 '공감'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회의장의 빛, 사운드, 움직임은 모두 대화의 첫 호흡을 유도하며, 각국 정상들의 시선이 예술 속에서 잠시 머무는 순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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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KTX역사 웰컴존에는 '천년의 문: 신라의 꿈을 지나'가 설치된다. 세계 각국 대표단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이 작품은 첨성대, 석굴암, 금관, 황룡사 9층 목탑 같은 신라의 상징들이 AI 알고리즘과 디지털 빛을 통해 재현된다. 특히 사라졌던 황룡사의 9층 목탑을 인공지능이 복원한 장면은 기술과 기억이 만나 과거의 시간을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한다. 신라 천년의 꿈이 디지털로 되살아나는 순간, 관람객은 '한국의 미래'를 본다.
경주 경제전시관에 설치된 '미래의 문'은 이 흐름을 확장한다. 첨성대의 정밀한 천문 구조, 석굴암의 황금비율, 황룡사의 찬란한 빛이 하나의 영상 서사로 이어진다. 관람객은 마치 신라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몰입감을 경험한다. 천년의 문화가 AI의 시선으로 재조명되며, 전통과 기술이 공존하는 K-컬처의 미래를 보여준다.
이이남은 이번 작품들에서 신라를 단순한 역사적 배경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는 전통을 '기억의 구조물'로, 기술을 '시간의 복원장치'로 다룬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인간의 상상력이 자리한다. '천년의 문'과 '미래의 문'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예술의 관문이자, 문화가 외교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상징이다.
◇ 넘어선 대화, 공감의 예술
"예술은 언어를 초월한 대화의 방식이다."
이이남은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를 이렇게 말했다. 언어와 이념의 벽을 넘어 서로 다른 문화가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그가 정의하는 예술 외교의 본질이다. 그의 작품이 APEC 정상회의의 중심에 놓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외교의 세계에서 공감은 가장 희귀한 자원이다. 숫자와 조항이 오가는 회담의 자리에서 예술은 잠시 숨을 돌리게 하고, 인간적인 표정을 되찾게 한다. 빛의 흐름이 대화의 리듬을 만들고, 영상 속 사운드가 심리적 거리를 좁힌다. 정치가 멈춘 자리에서 예술이 말을 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디지털 평화'라는 개념을 현실로 보여준다. 기술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의 수단이며, 예술은 경쟁이 아니라 이해의 도구라는 확신이 작품 전반에 녹아 있다. 경주의 빛, 신라의 기억, 그리고 디지털의 언어가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세계는 새로운 형태의 외교를 경험하게 된다.
◇ 한국 미디어아트, 외교의 언어로
이이남은 최근 광양국제미디어아트페스티벌의 개막식 총감독을 맡으며 국내 미디어아트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중국 쑤저우의 우문화박물관에서 열린 '예술 입은 한복' 전시와 항저우 전시에서도 전통과 기술을 융합한 작업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의 예술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문화외교'의 실험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국의 예술이 기술을 품고, 기술이 다시 예술의 감성을 되살리는 지점에서 그는 늘 새로운 문을 연다.
이번 APEC 정상회의는 그 여정의 결정판이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마주할 첫 빛, 첫 소리, 첫 장면이 모두 예술의 언어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예술의 중심에는 한국의 시간, 신라의 기억, 그리고 이이남이라는 이름이 있다.
정상들의 길 위에서 예술은 말없이 대화를 이끈다. 찰나의 명상 속에서 서로 다른 시선이 하나의 비전으로 모이고, 전통의 산수화는 디지털의 빛으로 되살아나 공존의 풍경을 그린다. 경주의 시간 위에 켜진 그 빛은 결국 한 가지 메시지를 남긴다.
진정한 대화는 말이 아니라 공감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그 공감의 첫 장면을, 예술이 대신 켜준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