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존재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공동체
잊힌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는 연극의 힘
|
작품이 그려내는 세계는 어디인지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인물들은 이름 없이, 이유 없이 깨어나 혼란 속을 헤맨다. "여긴 대체 어디인 걸까?", "왜 아무도 우릴 구하러 오지 않는 거야?" 같은 대사는 그들의 절박한 심리 상태를 대변하며, 존재의 이유를 향한 내면의 질문을 우리에게 전이시킨다. 이 무대는 더 이상 죽은 자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남은 존재들이 다시 서로를 응시하고 호명하기 시작하는 곳이다.
'브레멘'은 고전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서 서사의 단초를 가져오되, 곧 그것을 뛰어넘는다. 동화 속 동물들이 버려진 뒤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 떠났듯, 이 연극 속 인물들도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채 잊힌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향하는 '브레멘'은 도시가 아닌 감각의 지점이다. 물리적 도달지가 아닌, 서로를 향한 믿음과 연대, 그리고 다시 살아갈 용기라는 내면의 가능성이다.
|
이들이 마주한 공간은 외형상 폐허처럼 보이지만, 그 안은 살아 있는 감각으로 채워져 있다. 누군가는 잊힌 채 홀로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기를 거부했다. 각각의 기억은 일그러졌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뜨거웠던 삶의 흔적이 묻어난다. "누가 나를 지켜줄 건데?"라는 외침과 "혼자 있는 건 너무 무서우니까"라는 고백은, 이들이 단순히 죽음을 통과한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살아 있는 타자'임을 보여준다.
무대 위에서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대사, "함께 가요." "나도 갈게요." "나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는 이 작품이 단순한 개인의 자각이나 회복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이 말들은 공동체를 향한 간절한 요청이며, 인간이 끝끝내 손을 놓지 않으려는 본능에 관한 증거다. 단 한 사람도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그 다짐은, 연대의 언어이자 무너진 세계 위에 다시 세우는 삶의 윤리다.
무대미술과 조명, 사운드는 이 서사를 시각적이고 청각적으로 입체화한다. 어두운 천장 아래 무질서하게 쌓인 의자들, 천으로 가로막힌 중앙, 그 안을 흐르는 먼지와 찢긴 오브제들은 잊힌 자들의 상처와 무게를 고스란히 투영한다. 하지만 배우들의 신체는 이 폐허를 살아 있는 무대로 바꾼다. 그들의 움직임은 완벽하게 정돈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불완전함이 인물들의 불안과 욕망을 더욱 진실하게 전달한다.
음악 또한 중요한 축이다. 배우들이 직접 부르는 노래, 피아노 선율, 효과음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다층적 소리는 고통과 유머, 애도와 희망을 오가며 무대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말장난처럼 삽입된 유머적 사운드는 때때로 감정의 응어리를 유쾌하게 이완시키며, 현실과 환상, 슬픔과 웃음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
|
'브레멘'은 끝의 이야기이기보다는, 끝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고통과 침묵, 단절과 망각 속에서도 서로를 잊지 않고 다시 손을 잡는 이들의 여정은, 관객 각자에게도 오래도록 응어리져 있던 기억과 마주할 용기를 건넨다.
"너도 날 버릴 거야?"라는 질문에 "함께 가자"고 답하는 장면. 그 장면은 무대를 넘어, 이 극장을 나서는 우리의 삶에도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는다. '브레멘'은 잊힌 목소리들이 다시 살아나는 장소이며, 그들이 함께 노래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