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는 외화 유동성 부족으로 발생
수출증대 통한 달러 확보로 위기 극복
'부채비율 200%' 대우·현대 해체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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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은 지 27년이 지났다. 국민의정부는 IMF체제 3년 8개월 동안 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고 깊은 변화를 주도했다. IMF는 한국정부에 금융시장의 완전 개방과 함께 가혹한 금융·기업구조조정 정책 실행을 요구했다. 당시 기업계를 대변했던 전경련의 손병두 전 부회장을 만나 한국사회 변화의 중심축인 기업구조조정 과정을 돌아보고 위기에 빠진 한국경제 앞날에 대한 교훈을 들어본다.
[대담=김이석 논설심의실장·황남준 대기자]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를 경제현장에서 맞으셨는데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먼저 환율 정책에서 원인을 찾아야겠지요. 김영삼 정부가 OECD에 가입하기 위해, 달러 기준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기 위해, 환율을 달러당 700~800원대로, 이자율을 매우 높게 유지했습니다. 수출로 번 달러를 흥청망청 썼어요. 원화가 인위적으로 고평가되면서 백화점에 외제 물건이 넘치고, 국민들이 너도나도 해외여행 나가고. 수입이 늘어나 무역수지 적자가 3년이나 이어졌어요. 한마디로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세계화는 제대로 준비가 안 된 것이었어요.
두 번째로 세계화 여파로 단자회사가 종합금융회사(종금사)로 바뀌면서 종금사들이 해외에서 싸게 돈을 빌려 기업에 비싸게 빌려 주는 장사를 했습니다. 해외에서 보통 평균 4% 정도 금리로 6개월 단기에 빌려 기업에 3년 장기로 8%로 빌려줬습니다. 당시 시중금리가 12%정도였어요.
원래 단기자금이 장기자금보다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더 철저한 관리가 필요한데 오히려 3년 이상 장기 외채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단기자금은 정부의 허가가 필요 없었어요. 종금사가 들여온 6개월짜리 단기 외채를 우리 기업들이 빌려서 공장을 짓는다든지 투자를 했습니다. 과거에는 단기금융을 연장해주면서 장기금융처럼 쓸 수 있는 관행이 있었지요.
처음 태국 바트화가 무너지면서 동남아권, 특히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외환위기가 왔습니다. (한국은행 등의 거듭된 외환위기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문제없다고 그랬습니다만 외국금융기관들이 상환기간을 연장해주지 않고 갚으라고 하니 종금사들은 기업으로부터 상환을 못 받게 되니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서 갚기 시작했지요. 거기에다 한보, 기아 등의 처리가 미적거리고 노동법이 재개정되는 것을 보고는 외국금융기관들이 정부의 해결능력을 믿지 못하게 되어 돈을 빼갔습니다. 기업들이 외화부채를 못 갚으니까 정부 외환보유고에서 갚기 시작했습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서 외환위기가 온 것입니다.
-기업들이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낙인찍혀 구조조정 당해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았는데요.
-굳이 책임을 따진다면 관료나 금융기관 종사자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나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쪽에 더 문제가 많았습니다. 물론 기업인들에게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고, 생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이자율이 낮을 때 많이 투자했는데, 이것을 ‘과잉투자’다 ‘오(誤)투자’다 하면서 비난할 수는 없어요.
-한국에 적용된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IMF 플러스'라고 합니다. 외환위기를 거친 태국, 인도네시아 등 신흥국이나 선진국에 비해 IMF는 유독 한국에 강도 높은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요구했는데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다고 보십니까.
김영삼 정부는 말기에 경제가 위기라는 걸 알고 개혁을 추진했지만 용두사미가 됐어요. 김 대통령이 노동, 금융 개혁의지가 있었으면 끝까지 밀어붙여야 했는데 양보해 버립니다. 외환정책이 잘못됐고 한보· 기아차 사태 처리를 제대로 못해 위기를 키웠어요.
두 번째는 IMF 초기 1997년 11월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깡드쉬 IMF총재가 만나서 구제금융을 논의해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제시한 프로그램대로 개혁을 하겠다고 합의를 했어요. 그런데 합의 내용을 발표하는 날 김 대통령이 갑자기 강 부총리를 갈아치운 거예요. 임창열 새 부총리가 임명되면서 "우리는 IMF에 안 들어간다"고 발표해 버렸어요.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들어가기로, 금액도 정하고 공동발표하기로 약속해 놓고 번복했어요. 당시 대선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후보시절 'IMF재협상론'을 제기했어요. 이렇게 되자 IMF는 한국이 믿을 수 없다고 보고 남미 등에 적용했던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한국에 들이댔다고 봐야죠.
-외환위기를 외화 유동성 위기로, 아니면 기업들의 문어발식 방만한 투자의 결과로 보느냐에 따라 해결책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당시 외환위기를 보는 견해는 어땠습니까.
당시 단순히 유동성 위기라고 진단한 분은 김우중 회장밖에 없었습니다. 거의 전부 재벌의 문제라면서 기업들을 폄하하고 야단쳤지요. 김우중 회장은 세계를 뛰어다녀봐서 달러 유동성 문제만 극복하면 살아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구조조정은 경제 체질에 맞게 서서히 해야지 단번에 하면 문제가 너무 많다고 봤지요. 구조조정은 사람들을 자르는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김우중 회장은 외환위기가 왔으면 우리가 외화를 벌어서 갚아버리면 끝나는데, 외국사람들한테 당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했지요. 과격한 구조조정을 하면 오히려 후유증이 너무 커진다고 봤습니다. 지금도 김 회장의 시각과 진단이 옳다고 판단합니다.
-새 정부가 출범 전부터, 대기업이 경제위기의 주범이라고 낙인찍혀서 변화를 강요당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기업의 구조조정 작업이 일찌감치 진행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IMF 구제금융 신청 당시, 우리나라는 15대 대선을 치르는 와중이었고, 12월 18일 김대중 후보가 당선돼서 36년 만에 정권 교체가 됐습니다. 김 당선자는 그의 ‘대중경제론’에 입각해서 경제를 보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대기업에 대한 강한 개혁의지를 보였다고 봅니다. 김 당선자의 첫 공식 행보는 12월 24일 전경련 회장 등 경제5단체장과의 간담회였습니다. 김 당선자는 대기업의 자율적인 구조조정과 조속한 기업혁신을 주문했고, 최종현 전경련 회장은 무역수지 개선을 통해 IMF 파고를 헤쳐 나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때부터 대기업은 김대중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기업 구조조정 요구를 받고 넓고 깊은 변화를 겪어야 했어요. 1998년 1월 13일 김 당선자는 5대그룹 회장과 기업 경영 투명성 제고, 상호 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등 기업 구조조정 5대 원칙과 실천 방안에 합의했습니다. 물밑에서 새 정부 집권세력은 '삼각 빅딜'(자동차, 석유화학, 반도체 맞교환)을 추진합니다. 기업계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들렸어요. 어떤 당선자측 인사는 보름 만에 끝내라는 주문을 할 정도였어요.
김 당선자 측은 기업에는 이렇게 많은 요구를 했지만, 외환정책이나 금융회사의 문제점과 노동계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나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새 정부 출범 전부터 대기업이 유일한 구조조정 대상으로 부각된 것이지요.
당시 IMF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자본시장 개방, 부실금융기관 정리, 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 비율 충족 등 금융 부분에 대한 신속한 구조개혁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기업구조조정을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IMF가 요구한 정부와 노동과 금융과 기업 등 4대 개혁 가운데 당시 정부로서는 가장 만만했던 게 기업이었다고 봅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노동, 금융, 정부, 기업 등 모두 개혁돼야 하는데 기업에게만 직접 칼을 들이댄 거 아니겠어요? 기업이 가장 만만하게 개혁을 받아들일 조직으로 여겨졌고 실제 그랬던 것 같아요. 기업은 힘이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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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정부 출범 전후 외환위기 극복 방법을 놓고 논란이 많았습니다. 기업계의 '수출 증대'론 대(對) 새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론이 부딪쳤는데요.
위기극복에는 순서가 있지요. 일에는 긴박성과 중요성이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는 중요한 것보다는 긴박한 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먼저 숨을 쉬게 해야지요. 당시 긴박한 건 유동성 위기고 외환 위기니까 이걸 먼저 처리하고 그다음 여유를 가지고 중요한 것을 해결해 가는 것이 일의 처리 순서인데 앞뒤가 바뀌었어요.
기업구조조정도 중요하지만 유동성 위기 극복은 긴박한 과제였어요. 그때 국가의 총역량을 기업구조조정보다는 유동성 위기 극복 쪽으로 모았어야 합니다.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 여유를 가지고 기업구조조정을 하나하나 해 나갔으면 굉장히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국가적으로도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선진국으로 순항할 수 있었는데 중요성과 긴박성을 혼동해서 국민들이 더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봅니다.
-새 정부가 역사적 전환기에 중대한 정책 실패를 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당시 기업계를 대표했던 김우중 회장은 외화 유동성위기를 빨리 극복하고 구조조정을 하자는 입장이었는데 정부는 구조조정부터 먼저 하라고 하니까 국가경제가 어려워진 것이었죠.
그런데 결론적으로 보면 우리가 수출을 많이 해가지고 달러를 많이 벌어서 극복을 했잖아요. IMF프로그램 첫해인 1998년 정부는 무역흑자가 28억 달러라고 전망했지만 김 회장은 500억 달러를 예측했습니다. 실제 결과로 볼 때 김 회장의 예측이 옳았어요. 1998년 실제 경상수지는 404억 달러에 달했어요. 그 덕분에 외환보유고도 520억 달러까지 늘어났어요. 5대그룹의 수출 증대가 크게 한몫한 것이지요.
당초 1997년 11월 강경식 부총리하고 깡드쉬 IMF총재가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으니까 IMF가 외환위기의 급한 불을 꺼주면 우리가 구조조정을 차례로 하겠다고 합의를 했는데 그 진단이 옳았어요.
전경련 회장으로서 김우중 회장은 통찰력이 있었어요. 김 회장은 "우리가 투자해 놓은 설비가 많아서 (그 설비를 이용해 수출하면)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다. 우리는 아무 자산 없이 빚만 빌린 게 아닌데 정부 관료들은 그걸 못 본다"고 탄식했어요. 기업계는 신규 자금으로 시설 투자를 많이 해서 수출 생산품 설비가 많았다는 것을 관료들은 보지 못했고 김우중 회장은 봤어요. 그래서 1998년 수출전망이 서로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어요.
김우중 회장은 한탄하셨어요. "2년 뒤면 아무런 문제 없는데 지금 구조조정 하라고 하니까. 그러면 알짜배기 시설투자가 해외로 다 날아간다"고. 실제로 그냥 다 날아갔잖아요. 우리 기업들이 구축해 놓은 브랜드 가치까지 합치면 우리는 엄청난 국가적인 손실을 입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기업구조조정을 위한 핵심 정책수단으로 '대기업 부채 비율 200%이하로 줄이기'를 제시합니다만.
이 정책은 당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낸 것입니다. 새 정부 출범 전인 1998년 2월 9일 30대 그룹 기조실장을 불러 2002년 말까지 부채 비율을 200% 이하로 줄이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 기한을 2002년에서 1999년 말까지 무려 3년을 앞당기라고 했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이 정책은 기업계로서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조치였을 텐데요.
부채비율을 200%로 2년 안에 선진국처럼 낮추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면 기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술은 잘했는데 환자는 죽는 셈이죠. 기업들이 구조조정으로 알짜 자산을 헐값에 내놓는 그런 결과를 초래했어요. 그것도 매각 기업 명단까지 정부가 공개하니 더욱더 헐값에 팔릴 수밖에 없었죠. 당시에 정부와 기업이 충분히 소통을 했더라면 경제적 충격을 덜면서 길을 찾을 수 있었어요.
부채비율 200% 정책은 1998년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1999년 8월 대우그룹, 2001년 현대건설과 현대전자 워크아웃에 적용한 근거가 바로 부채비율 200% 정책입니다. 발표 당시에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고 김대중 정부 부채비율 200% 정책은 결국은 족쇄로 작용해서 경제 전체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대우그룹과 현대그룹 해체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손병두 전 전경련 부회장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전경련 상근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외환위기가 닥쳐 올 때 한보철강 및 기아자동차 조기 구조조정, 무역수지 흑자 확대, 금융 및 노동 개혁, 금리인하 및 원화가치 절하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1998년 2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강력한 기업구조조정 정책을 기업계를 대변해 온몸으로 받아냈다. 새 정부가 시장의 원리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추진했던 '3각 빅딜'(자동차, 화학, 반도체업종)이 무산되자 1998년 7월 정부와 기업계 간 자율적인 기업구조조정 합의 원칙을 이끌어 냈다. 추진기구인 정·재계구조조정협의체('정·재계간담회')의 재계 간사를 맡아 정부 측 간사인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과 7대 업종 자율 기업구조조정 작업을 조율·실행했다. 당시 이병욱 전경련 기업경영팀장과 함께 소공동 롯데호텔에 '재계복덕방'을 차려놓고 5대그룹 구조조정 담당자들과 사업교환 작업을 이끌었다.
정부가 깊숙이 개입한 반도체, 자동차 빅딜은 실패했으나 그가 직접 조율한 5개 업종의 사업구조조정은 적잖은 성과를 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출자총액한도제 예외조항 등의 정책을 건의해 실현해 내기도 했다. 그는 재계 총수들과도 두터운 인맥을 바탕으로 원만하고 활발한 소통을 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 때는 비서로 재직했고 정몽구 현대그룹 공동회장과는 고교 동기동창으로 막역한 사이였다. LG그룹과는 구자경 회장과 동향후배로서 신뢰를 쌓고 있었다. 전경련 회장이었던 최종현 SK그룹 회장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부회장으로 잇따라 보좌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전인 2003년 2월 전경련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