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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숙 칼럼] 양성평등의 나라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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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04. 14. 18:00

이승만 관련 역사 바로잡기 <6>
여명숙
여명숙 철학박사, 전 게임물관리위원장
◇'여성 인권' 외피 두른 대국민 세뇌 사기극

구한말 조선은 문맹률 99%의 나라였다. 계집애는 쓸모없다고 내다 버렸다. 그래서 망했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이 제로에 수렴하는 출산율 꼴찌 국가가 됐다. 남자니까 죽으란 소리까지 들리니 곧 망할 것 같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나? 여성 인권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는 자들과 세계가 인정하는 병명인 K-페미니즘이라는 망국병을 퍼트리는 자들이 있으니, 매국노 고종이나 이완용보다 더 나쁜 이들이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수법 중에 거짓 역사교육으로 세대를 바꿔가며 세뇌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대체 그 저열하고 야비한 전술로써 저들이 가리고 지우려 한 이승만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승만의 무수한 업적 중 그의 '여성' 인식은 최첨단
해방 후 이승만은 '과도정부 당면 정책 33항' 중에서 아래 4개 항을 통해 남녀평등 정책과 의무교육을 계획하고 이후 제헌헌법에서 기본권으로 보장했다.

"우리 독립국의 건설은 민중의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국법상에는 다 평등 대우를 주장할 터입니다." "이 주의 내에서 최소한도 내에 정부를 조직하되 남녀를 물론하고 18세 된 시민권을 가진 자는 다 투표권과 또 피선거권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강제교육령을 발하여 학령에 참여한 남녀 아이는 학교에 안 가지 못하게 할 것이며 교육경비는 정부의 담보로 할 것"

"국민의 문화를 발전하되 정부에서 경비를 담임할 것" 우남실록 中 (유영익 著, '이승만의 삶과 꿈'에서 재인용)

놀라운 것은 이승만의 이 모든 생각이 이미 이십대 약관의 나이에 반란죄로 잡혀가 고초를 겪던 시절에 확고하게 다져졌다는 사실이다. 1904년 옥중 집필서인 〈독립 정신〉은 우매한 백성을 일깨워 교화된 국민이 되게 하는 국민교과서이자 서방세계가 대한민국의 독립을 돕게 하는 촉매제로 활용됐다. 어떤 사슬이나 형틀도 이승만의 지성과 열정에서 비롯된 건국 비전을 막지 못했다. 이제야 지옥을 복당(福堂)이라 부르던 젊은 선각자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상상을 해도 한성감옥 시절 중죄수 복장으로 그렇게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보다 더 '힙'할 수는 없으리라.

이승만의 업적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가장 '힙'한 것은 단연 여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승만은 어떻게 처음부터 여성 투표권을 신생 국가의 기둥으로 박아 넣을 생각을 했을까? 일찍이 선진 문명국에서 공부하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정치인의 관점에서 참정권 투쟁으로 피 흘리고 괜한 사회적 비용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여성의 것은 처음부터 여성에게 주는 것이 실용적으로 보았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120년 전 청년 이승만의 분노를 떠올리는 것이 더 정확한 답변이 될 것 같다.

"한국 사람이 짐승 같은 저열 상태에 빠져 있는 한 한국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中-"

◇대한민국 여성 인권의 아버지 이승만, 어머니 이태영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의회정치가 발달한 영국에서조차 1913년 "여성에게 투표권을!" 외치며 경주마 앞에 뛰어든 에밀리 데이비슨이 목숨을 잃은 지 5년 후에야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것조차 30세 이상 여성에 한해서였고 남녀의 동등한 참정권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928년에야 얻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1920년에야 여성참정권이 허락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랑스의 경우인데, 여성인권운동가 올랭프 드 구주가 프랑스혁명 당시 여성 권리선언문을 발표하자 '자신의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죄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일찍부터 여성 인권 사상이 싹텄음에도 프랑스혁명 후 무려 150년이 더 지난 1946년에야 법적으로 여성참정권이 보장된 것이다. 가장 압권은 2015년까지 여성의 정치참여를 막아온 사우디의 경우다.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적 억압 환경은 사우디 여성들이 평생 뒤집어쓰고 사는 '니캅'만큼이나 상상만 해도 역겹다.

이승만에게도 여성 차별 혐의를 피할 수 없는 약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 박사를 판사 임용에서 제외했던 일이다. "여성은 아직 이르니 가당치 않다"는 게 한 가지 거부 이유였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거물급 야당 의원의 아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2년 후 다른 여성판사 임명엔 흔쾌히 동의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태영을 거부했던 것은 성차별보다는 "야당 집 마누라를 판사 자리에 앉혀 놓았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정치적 이유 때문으로 볼 수 있겠으나 여전히 아쉬운 대목이다.

이후 이태영은 성차별이 디폴트값인 시대라서 판사 임용에 거부당한 설움을 동력 삼아, 아직도 조선시대 가치관에 갇혀 사는 여성들의 억울한 문제를 푸는 일에 직접 뛰어들었다. 최초의 여성 변호사 사무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온 고무신 부대의 눈물과 하소연으로 매일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녀는 가족법 전문 변호사로 맹활약하면서 가정법원 설립, 가족법 개정과 호주제 폐지의 기틀을 닦아 여성 인권운동의 선구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사실상 이승만과 이태영을 대한민국 여성 인권의 아버지요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여성참정권이라는 고속도로가 없었더라면 500년 묵은 호주제를 반세기 만에 폐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가정법 개정이 없었더라면 한국 여성들도 아랍 여성들의 부르카보다 더 어두운 정신의 감옥 속에서 살거나 유혈 시위에 내몰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피와 어머니의 피눈물, 대한민국 여성 인권은 그들이 대신 지불한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공짜가 아니다.

◇지금은 '사실의 칼'로 싸울 때

23세 사형수에서 70세 건국 대통령이 되기까지 이승만의 무기는 오직 사실의 칼 하나뿐이었다. 그의 연설은 언제나 재밌고 정직하고 정보가 넘쳤다. 모두 사실에 기반한 힘이다. 그렇게 해서 세계를 감동하게 했다. 바로 이 점에서 〈독립정신〉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진영을 넘어서서 사실의 칼로 싸워 이기고 다시는 노예의 길로 들어서지 말라. 세계는 넓고 모두 너희의 것이다.' 짐승처럼 저열한 자들한테 지배당하고 싶지 않으면 보수는 보수 자신의 저열함부터 잘라내라는 주문이다. 100년째 나라의 절반을 상대로 이승만 대통령 혼자 싸우게 하면 후손으로서 너무 부끄러운 일 아닌가. 그럴 수는 없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여명숙 철학박사, 전 게임물관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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