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강성학 칼럼] 대의 민주주의는 현대판 “귀족정치”가 돼야 하지 않을까?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3.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327010016311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3. 27. 18:12

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전제정치에 지나지 않으며, 민주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일 뿐이다.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며 민주주의는 자유의 보루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하나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자유가 반드시 민주주의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민주주의가 반드시 자유를 보장하지도 않았다. 18세기 계몽주의시대 이래 자유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였으며 대의 민주주의는 최선의 근대 정치제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서양문명의 샘인 그리스 고전철학자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자유나 평등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정의로운 삶에 있었고 정의를 가장 잘 실현하는 정치제도를 구상할 때 그들은 오히려 자유나 민주주의에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자유나 민주주의를 상대적으로 열등한 가치와 정치제도로 간주함으로써 근대 인간들로부터 반(反)민주주의자 혹은 비(非)민주주의자로 비판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해 그처럼 부정적이었을까? 근대 대의민주주의의 맥락에서도 그들은 반민주주의자나 비민주주의자로 해석돼야 하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로 시작하는 고전철학자들은 자유로운 사회 속의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 속의 정의로운 인간을 모색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로운 인간, 즉 민주적 인간이나 그런 인간을 조장하는 민주주의를 다른 인간형이나 정치체제보다 낮게 평가했다. 그들은 공동체의 정치제도의 형태와 그 구성원들의 인간형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호관계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방식의 어떤 변화는 정치제도의 변화를 전제하는 것이며 변화의 달성은 오직 정치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들에게 민주적 인간의 생활은 "무원칙의 원칙"에 따라서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였다. 민주적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정신적 무질서가 지배하여 우선 권위의식이 상실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처럼 행동하면서 아들을 두려워하고 아들은 아버지처럼 행동하면서 아버지 앞에서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유로운 것이다…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흉내내고 말과 행동에서 어른들과 경쟁하며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수준으로 떨어져서 젊은이들을 흉내내면서 고분고분하고 매력에 넘치게 된다. 그들은 불결하다거나 전제적으로 보이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권위 부재(不在)의 민주적 삶은 결국 말초적 욕망의 포로가 될 성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열등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은 객관적인 것으로 개인 각자가 자신의 덕목을 최대로 활용하여 국가에 기여하는 보람을 뜻한다. 그러나 근대의 정치철학자들은 행복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고, 또 각 개인에게 "행복추구권"이 있기에 국가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야경꾼의 역할 이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주관적 행복을 선택할 자유와 그것의 실현방법인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어 민주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제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민주주의는 칼 마르크스의 공산혁명을 겪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인(超人)을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통해 경험하면서 자유와 사회적 정의 모두를 외면할 수 없다는 역사적 현실에 직면케 됐다. 그리하여 자유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복지사회"의 구현으로 역사적 방향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는 마르크스와 니체의 도전에 부대끼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시대의 현실이다. 마르크스적 공산사회의 의미 없는 평등의 삶과 니체적인 파괴적 허무주의적 삶은 평등이나 자유의 맹목적 추구의 결과이다. 마르크스의 이상사회의 허구나 니체의 문명건설을 위한 독선에 대한 방부제는 자유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들의 병폐를 경계하는 일이다. 그러한 최고의 방부제는 역시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게 민주주의의 취약점을 논의했던 고전철학자들에게 돌아가는 일이 아닐까 한다.

고전 철학자들은 반(反)민주주의자였기에 근대에 와서 무조건 거부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근거에서 민주주의자들이 아니었는가? 그리스 시대나 지금이나 민주주의는 항상 국민 모두에 의한 직접 통치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왜냐하면 만장일치는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실제로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통치다. 만일 안정된 다수가 있다면 이 안정된 다수가 민주주의를 지배한다. 그렇다면 안정된 다수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정치사회에는 아주 간단히 말해 부자와 빈자의 두 집단이 있으며 이유야 어쨌든 빈자가 언제나 다수다. 그러므로 그는 민주주의를 빈자의 통치로 보았다. 여기서 빈자는 거지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빈자들은 삶을 위해 벌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충분한 정치적 이론과 교육을 받을 여유가 없다. 그들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무식한 자의 통치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고전철학자들이 비(非)민주적이라고 비난을 받는 데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그것은 인간들이 원래 정치적으로 관련된 분야에서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불평등은 근대 자유민주주의도 인정하고 있다. 즉, 근대 민주주의는 평균인 이상이라고 믿어지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대표"로 선출하는 "대의 민주주의 제도"이며 이것은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에 의하면 단순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커다란 향상이며 개선이다. 따라서 고전철학자들의 비(非)민주주의적 입장은 근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환경의 전제 위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은 고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을 뿐 근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의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교육을 통해 알고 있는 정의로운 자의 통치가 바람직하다는 원칙을 지키려 했다. 그것은 거의 모든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에 대해 논의하고 독자적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시민교양의 전제 위에 서 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지식, 습관 그리고 인격을 생산하는 교육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일찍이 미국의 국부들인 조지 워싱턴과 토마스 제퍼슨은 민주공화정의 유지를 위한 대학의 설립을 주장했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종합대학이 아니라 아마 정치교양교육 대학을 의미했을 것이다.
오늘날 유권자들 중 정치에 아주 무관심한 이들도 많지만 자기의 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투표권을 행사하는 유권자들은 대부분 이미 상당한 교육을 받았으며 정치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하고 자신의 입장을 가다듬는다. 그들은 자신보다 더 애국적이고 올바른 공적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할 정치적 지식과 교양 있는 신사와 숙녀를 선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의 대의 민주주의는 마땅히 일종의 품위 있는 "귀족정치"가 돼야 한다고 생각된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